김종직·권오복·김일손·권경유 등의 사초를 불사르다

봉선사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 근처)
봉선사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 근처)

1498년 7월 27일에 김일손 등을 처형한 연산군은 7월 28일에 김종직·권오복·김일손·권경유등의 사초(史草)를 모두 불살라 버리도록 실록청(實錄廳)에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8일 3번째 기사)

이 날 연산군은 명하여 박경을 석방하게 하고, 이어서 "박경이 말한 것은 삭제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박경의 공초는 승려 학조(學祖)가 영응대군(永膺大君)의 부인 송씨를 몰래 간통했다는 사실이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8일 6번째 기사)

7월 12일에 의금부 경력 홍사호 등은 김일손이 공초한 것을 연산군에게 서계(書啓)하였다.

“사초에 ‘중 학조(學祖)가 능히 술법으로 궁액(宮掖 대궐안의 하인)을 움직인다.’ 한 것은, 대개 해인사는 본시 임명된 주지(住持)인데 학조가 내지(內旨)를 칭탁하고 그 권속으로써 노상 지음(持音)을 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또 ‘대가(大家)와 교통한다.’한 것은 학조가 광평대군·영응대군의 전민(田民)을 많이 얻었기 때문이고, 또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군장사(窘長寺)에 올라가 법(法)을 듣다가 시비(侍婢)가 잠이 깊이 들면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것은 박경(朴耕)에게 들었다.’고 공초하였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2일 6번째 기사)

이러자 박경은 즉시 끌려왔다. 박경은 공초하기를, “신은 정유(丁酉) 연간에 사경(寫經)의 일로 봉선사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동대문에 방(榜)이 붙기를,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중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 하였기에, 신은 이것을 김일손에게 이야기해 주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2일 9번째 기사) 
박경은 정유년(1477년 :성종 8년) 즈음에 불경을 베끼는 일로 세조의 능이 있는 남양주 광릉의 원찰(願刹)인 봉선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에 붙어 있는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중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방(榜)을 보고 김일손에게 알려준 것이다.

여기에서 승려 학조와 영응부인 송씨에 대하여 알아보자. 승려 학조(學祖)는 부친이 김계권, 숙부는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다. 그는 승려 신미(信眉)·학열(學悅)등과 함께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사찰 중창과 불경 언해에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1468년에 세조가 승하하자 세조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광릉(光陵)에 묻혔다. 예종은 모친인 세조 비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1469년(예종 1) 9월 7일에 세조의 능침 아래에 봉선사(奉先寺)를 중창하였는데 이때 학조가 낙산사(洛山寺)로부터 와서 부엌 10여 간을 고쳐 세웠는데, 제조(提調)·낭관(郞官)은 감히 한마디 말도 끼어들지 못하였다. (예종실록 1469년 9월 8일)

불교가 탄압받은 조선 시대에 학조는 ‘웅문거필(雄文巨筆)의 문호(文豪)’라는 칭송을 받았고 위세가 대단했다. 심지어 성종이 학조가 병이 중하므로 내의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다. (성종실록 1483년 12월 29일)   

하지만 승려 학조는 유생으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성종실록 1482년 5월 19일) 여러 명의 여자와 스캔들에 휘말렸으며
(성종실록 1479년 4월 13일), 조선왕조실록은 학조를 ‘교만하고 방자하여 위세를 부리는 자’ 혹은 ‘요승(妖僧)’으로 평가하였다.

한편 세종의 8남이자 막내아들인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1467)의 부인인 대방부인(帶方夫人) 송씨는 판중추부사 송복원의 딸이며 지돈녕부사 송현수(단종의 장인)의 누이로서 단종비 정순왕후의 친고모이기도 하다. 단종비 정순왕후가 간택되었을 때에도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영응대군이 1467년에 죽자 송씨 부인은 불교에 귀의하여 법회(法會)를 열고 승려와 가까이 했는데 그 중 한 명이 학조였다. 그녀는  학조와 사통하는 스캔들까지 벌였으며 동대문에 방(榜)이 붙을 정도였다.  

그런데 송씨는 1479년 6월에 연산군의 생모인 중전 윤씨(? ~ 1482)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폐서인(廢庶人) 되자 어린 원자인 연산군을 잠시 보살핀 적도 있어 연산군과 각별하였다. 그래서 연산군은 학조와 송씨 부인의 추문을 삭제하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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