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의 전말 (3) 

연산군 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연산군 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1498년 7월 29일 자 「연산군일기」는 계속된다. 

“유자광이 연산군이 노한 틈을 타서 일망타진할 생각으로, 윤필상등에게 눈짓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들의 악은 무릇 신하 된 자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이니, 마땅히 그 도당(徒黨)들을 추구하여 일체를 뽑아버려야 조정이 바야흐로 깨끗해질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 도당이 다시 일어나서 화란(禍亂)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니, 좌우가 조용하여 말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72세의 노사신(1427∼1498)이 손을 저어 말리면서 말하였다.
 
‘무령(武靈 유자광의 봉호 封號)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오. 저 당고(黨錮)의 일을 들어보지 못했소. 금망(禁網)을 날로 준엄하게 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족적(足跡)을 용납할 곳이 없게 하다가 동한(東漢 25~220)도 역시 망하고 말았으니, 청론(淸論)하는 선비가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 하오, 청론이 없어지는 것이 국가의 복이 아니거늘, 무령(武靈)은 어찌 말을 어긋나게 하오.’ ”  

노사신이 언급한  ‘당고(黨錮)의 일’은 동한 말년에 황제 측근인 내시들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려고 선비들을 당인(黨人)이라 하여 모두 죽이고 금고(禁錮)하였다. 이를 당고(黨錮)라 한다. 그 결과 동한은 망하였다. 

한편 1492년에 좌의정, 1495년에 영의정에 올랐던 노사신은 무오사화가 일어난 지 40일 후인 1498년 9월 6일에 별세했는데, 연산군일기에 졸기가 실려 있다. (연산군일기 1498년 9월 6일 7번째 기사)

“선성 부원군(宣城府院君) 노사신(盧思愼)이 졸(卒)하였다. (...) 무오년(1498년) 9월에 병이 위독하자 왕이 승지 홍식을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노사신은 아뢰기를 ‘신은 말씀드릴 것이 없사옵고 다만 상과 벌을 적중하게 할 것과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기를 원할 뿐이옵니다.’ 하였다. 나이 72세였다. (...) 사옥(史獄)이 일어나자, 윤필상·유자광 등이 본시 청의(淸議)하는 선비를 미워하여, 일망타진하려고 붕당(朋黨)이라 지목하니, 노사신은 홀로 강력히 구원하면서 ‘동한(東漢)에서 명사들을 금고하다가 나라조차 따라서 망했으니, 청의가 아래에 있지 못하게 해서는 아니된다.’ 하였다. 그래서 선비들이 힘입어 온전히 삶을 얻은 자가 많았다. (후략)”

계속하여 7월 29일의 연산군일기를 읽어보자.
  
“이러자 유자광은 노사신의 말을 듣고 조금 저지되기는 했으나, 뜻이 오히려 쾌하지 아니하여 무릇 옥사(獄辭)에 연결된 자는 반드시 끝까지 다스려 마지 않으려 하니, 사신이 또 말리며 말하기를, ‘당초에 우리가 아뢴 것은 사사(史事)를 위함인데, 지금 지엽(枝葉)에까지 만연되어 사사에 관계되지 아니한 자가 날마다 많이 갇히고 있으니, 우리들의 본의가 아니지 않소.’ 하니, 자광은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급기야 죄를 결정하는 날에 노사신의 논의가 유독 같지 아니하니, 유자광은 낯빛을 붉히며 힐책하다가 각기 양론을 아뢰었는데, 연산군은 유자광 등의 의논을 좇았다.

이날 대낮이 캄캄하여 비가 물 쏟듯이 내리고, 큰바람이 동남방에서 일어나 나무가 뽑히며 기와가 날아가니, 성안 백성들이 놀라 넘어지고 떨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유자광은 의기양양하게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유자광의 위엄이 중외에 행해져서 조정이 독사(毒蛇)처럼 보고 감히 그 뜻을 거스르는 자가 없었다. 유자광은 바야흐로 제 세상인양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으니, 이욕만 즐기는 염치 없는 무리들이 따라 붙어 노상 문에 가득했으며, 유림(儒林)들은 기가 죽어서 들어앉아 탄식만 하고 있으므로 학사(學舍)는 쓸쓸하여 몇 달 동안 글을 읽고 외우는 소리가 없었다. 부형들은 그 자제를 경계하기를, ‘공부는 과거에 응할 만하여 그만두어야 한다. 많이 해서 무엇하느냐.’ 하니, 식자들이 탄식하기를, ‘무술(戊戌 1478년 임사홍과 유자광을 귀양 보낸 사건)의 옥(獄)은 정류(正類)가 사당(邪黨)을 다스린 것이요, 무오(戊午)의 옥은 사당이 정류를 모함한 것이다. 20년 사이에 일승일패를 했는데 치(治)와 난(亂)이 따랐으니, 애석하도다! 군자가 형(刑) 쓰는 것은 항상 관대함에 치우치고, 소인이 원망을 보복함은 반드시 잔멸(殘滅)하고야 말았도다. 만약 무술년의 군자들이 능히 그 율(律)을 다 썼던들 어찌 오늘의 화(禍)가 있겠는가.’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9일 2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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