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 유배지에서 죽다 

김일손 묘소 (경북 청도군)
김일손 묘소 (경북 청도군)

1512년(중종 7년) 6월 15일에 유순정·성희안 등이 여진족들의 난동 대책을 의계(議啓)하면서 유자광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뢰었다. 

“유자광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국가에 공로가 있는데 지금 그 자손들이 다른 곳에 나뉘어 귀양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유자광이 죽었으니, 청컨대 익대공신(翊戴功臣 예종 즉위년에  유자광이 남이의 모반 사건을 고발하여 받은 공신)의 작호를 도로 주어 자손들로 하여금 예장(禮葬)하게 함이 어떠합니까?”
 
이러자 중종은 “유자광은 공신의 예로 장사지내는 것이 가하다."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1512년 6월 15일 3번째 기사) 

유자광(1439∽1512)은 1507년에 경북 평해(울진군)으로 유배 간 지 5년 만에 죽었다. 나이 74세였다. 

다음 날인 6월 16일에 대간이 합사(合司)하여 아뢰었다. 

"유자광은 죄가 중하기 때문에 당초에 공신의 훈적을 삭제하고 그 죄를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공신의 직호를 도로 주어 예장하게 하니,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러자 중종은 "유자광이 죽은 것을 내가 알지 못했었는데, 어제 정승이 아뢰기를 ‘그가 이미 죽었으니 마땅히 훈적을 도로 주어 예(禮)에 의해 장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전교했다. (중종실록 1512년 6월 16일 2번째 기사) 

6월 17일에도 대간이 합사하여 아뢰었다. 

“유자광이 훈적을 삭제하여 영구히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으나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시장터에서 죽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그런데 그가 죽자마자 훈적을 회복하십니까. 전하께서는 유자광의 죄악을 살피소서"

하지만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12년 6월 17일 4번째 기사) 

6월 21일에 홍문관 부제학 권민수 등이 다시 아뢰었다. 

"유자광의 훈적을 도로 주고, 또 예장하게 하셨다 하니,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무오년(1498년)의 화(禍)는 비록 이극돈이 사국(史局)의 일을 누설하였기 때문이기는 하나, 그 뒤에 유자광이 홀로 권세를 부리고, 사사로운 분(憤)으로 죄없는 사람들을 무함(誣陷)하여 조정의 선한 선비들을 일망타진하였으니 그 화가 참혹했습니다. (...) 지금 그가 죽자, 특별히 자손들을 석방하고 예장하게 하였으니, 비록 대신이 아뢴 것이라해도 크게 잘못입니다.”

이에 중종이 "유자광이 익대한 공이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권민수 등은 네 번이나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12년 6월 21일 4번째 기사)

6월 22일에도 권민수 등이 유자광의 은혜를 거두기를 청했다.

"유자광은 본래 일개 간흉입니다. 세조께서 얼천(孽賤)에서 발탁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습니다. 예종 때에 남이가 반역했다고 고변하여 외람하게도 익대공신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음흉하고 사특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며 임사홍과 결탁하여 사림들을 모함하다가 성종 대에 죄를 얻고 유배당했습니다.  
그러다가 연산군 때 정치가 혼란해지자 독기를 부려 무오사화를 일으켰고, 갑자사화까지 간여하였으니 유자광의 죄는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은 그의 살과 가죽을 씹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삭제한 훈적(勳籍)을 회복하고 또 예장(禮葬)하게 하여, 죄 없는 사람과 같게 하시니, 전하께서 나라 그르친 간흉을 은혜로 옹호하기를 어찌 이토록 후하게 하십니까. 바라건대, 속히 거두소서."

하지만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12년 6월 22일 3번째 기사)

6월 23일에도 권민수 등은 네 번이나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12년 6월 23일 3번째 기사)
 
이 날 중종은 이손 등에게 전교하였다. 

“유자광의 일은 대신들이 ‘훈적을 도로 주어 예장함이 좋겠다.’하였고, 나도 일찍이 유자광은 익대한 공이 크다고 생각하여 윤허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간과 시종들이 논쟁하고 있다. 내가 다시 생각해보니 유자광의 자손들을 석방한 은혜도 큰데, 훈권을 도로 주고 예장하는 것을 함께 허락하는 것은 급히 서두르는 듯하니, 의논하여 아뢰라.”

이러자 이손 등이 아뢰었다.

“유자광이 이미 큰 죄를 졌는데, 특별히 그 자손들을 석방하였으니, 훈권을 주지 않는 것이 타당합니다.”
(중종실록 1512년 6월 23일 5번째 기사)

결국 유자광은 익대공신 훈적을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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