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신 순례 (8) 

진주 촉석루
진주 촉석루

1487년(성종 18) 9월에 김일손(1464∽1498)은 노모 봉양을 위해 진주 목학(晉州牧學) 교수를 청하여 나갔다. 나이 24세였다. 1488년 3월엔 진주목사 경태소등 21인과 촉석루에서 수계하고 서문을 지었다. 이어서 함양남계에 가서 일두 정여창(1450∽1504)을 만났다.  

이즈음에 김일손은 함안에 사는 생육신 조려(趙旅 1420~1489)를 찾았다. 조려는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서 태어났는데 1453년(단종 1)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런데 1455년에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그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함안 서산(西山) 아래인 고향 집에 돌아와 살았다. 후세 사람들은 조려의 삶을 백이와 숙제에 비유하여 군북면 원북리 앞산을 백이산(369m), 남쪽 봉우리를 숙제봉, 북쪽 봉우리를 백이봉이라고 불렀다. 
 
조려는 낚시로 소일하여 스스로 호를 어계(漁溪)라 하였고, 세상을 등지고도 번민함이 없는 뜻이 김시습과 같았다.  

한편 1458년(세조 4) 봄에 공주 동학사에서 단종을 위한 초혼제가 열렸다. 조려는 조상치·김시습 등과 함께 참례했다.  

그는 국화주를 마시는 9월 9일 중양절엔 높은 곳에 올라 단종을 그리워했다. 그가 지은 시를 읽어보자 

시 읊는 붓 밑에는 하늘땅이 넓었는데               沈吟筆下乾坤闊
취해서 어지러운 술잔 앞엔 세월마저 더디구나.       爛醉樽前日月長
슬프다, 늙은 몸이 살아 늦도록 고생하니             嗟哉潦倒生苦晩
일편단심 고운 님을 꿈속엔들 잊을소냐               懷佳人兮不能忘

한편 조려가 김일손을 만난 1488년은 그의 나이 68세였는데 외로움에  무척 좋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김일손은 다시 소식이 없었다. 

조려는 서운함을 적은 시를 김일손에게 보냈다. 7언절구(七言絶句)가 『탁영선생문집』에 실려있다.    

한번 가더니만 하늘 끝인가 결국 오지 않고        一去天涯遂不來 
다시는 소식이 없으니 무엇을 애달파하랴          更無消息竟何哀 
지금도 홀로 서서 어계 언덕에서 물고기 잡으며    如今獨立漁溪畔 
그대가 아니라 소개한 사람을 원망하노라          不怨伊人却怨媒 
 
조려는 김일손이 끝내 오지 않아 무척 서운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나랏일을 하니 그러겠지 하며 소개한 사람을 원망했다. 그런데 누가 조려에게 김일손을 소개하였을까? 

조려의 시를 받은 김일손은 황급히 답시를 보냈다. 

「어계(漁溪) 조 선생의 시에 삼가 화답하여 멀리 부치다, 무신년(1488)」  (시의 압운은 2구의 애(哀)와 4구의 매(媒)이다.) 

숨어 있는 붉은 꽃 누굴 향해 피었을까            幽花一朶向誰開 
창자를 끊는 듯 봄 숲의 두견새 슬피 우네         斷腸春林蜀魄哀 
봄바람에 꽃잎이 다 떨어진다고 해도              縱被東風零落盡 
단심(절개)을 지킬 뿐 벌 중매로 시집을 갈까      守紅不許嫁蜂媒 
(김일손 지음 · 김학곤등 1인 옮김, 탁영선생문집, 탁영선생숭모사업회, 2012, p 399)

두견새는 ‘돌아가지 못한 혼’인 불여귀(不如歸)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서는 단종 임금을 상징한다. 시에 봄 숲(春林)이 나오는 것을 보면 1488년 봄에 쓴 것이리라.   

김일손의 시를 받아본 조려는 이듬해인 1489년에 세상을 떴다. 


1699년(숙종 25)에 영남의 선비들이 조려의 절의를 보고하니 이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고, 1703년(숙종 29) 11월에는 그가 살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졌다. 『숙종실록』을 읽어보자.  

함안(咸安)의 고(故) 진사(進士) 조려(趙旅)를 포증(褒贈)하고,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조려는 단종조(端宗朝) 사람으로 선대(禪代)하던 날 읍사(揖辭)하고 돌아가서는 종신토록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 자신의 감회를 붙인 시(詩) 한 수가 세상에 전해진다. 

눈을 들어 돌아보니 강산은 저물었고,             回頭擧目江山暮,
땅은  넓고 하늘은  높은데 생각만 아득하네.      地闊天高思渺茫
복희씨와 헌원씨는 멀어졌으니 슬픔이 한이 없고   羲軒遠矣悲何極,
요임금과 순임금은 뵐 수 없어 마음만 애닯구나.    勛華不見心自傷
(숙종실록 1703년 11월 16일)

1706년에는 함안군 군북면에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세워졌다. 서산서원에는 그를 비롯하여 김시습·이맹전·원호·남효온·성담수 등이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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