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신 순례 (9)

부여 무량사 (김시습이 입적한 곳)
부여 무량사 (김시습이 입적한 곳)

1490년(성종 21) 9월에 김일손(1464∽1498)은 남효온(1454∽1492)과 함께 북한산 중흥사에서 머물고 있는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을 찾아갔다. 세 사람은 백운대에 오르고 담소하면서 5일 동안 함께 지냈다.

10월에 김일손은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고, 11월에는 진하사(進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다. 1489년 겨울 요동질정관(遼東質正官)으로 북경에 간 이후 두 번째 북경행이었다. 서장관(書狀官)은 정사와 부사를 보좌하며 사행의 기록과 보고를 담당하는 직임인데, 하급 관원에 대한 규찰을 담당하는 행대어사(行臺御使)를 겸하였다. 요동 질정관으로 다녀온 지 1년 만이었다. 

그때 중국에서의 소감을 「지난 여행의 감회를 노래하다」에 담았다.

이렇게 시작한다. "수레와 말이 넘쳐나 오르고 내리며, 번화한 문물 백 년의 성대함을 자랑하는구나." 

그러나 인재를 만날 수가 없었다.  
 
도포 입은 선비들 몰려들어                  來縫掖之貿貿兮 
군자 소인 뒤섞여 괴상한 것만 물어보며      相怪問兮雜薰蕕 
짧은 글 주면서 사귀자고 청하니             贄短章而求友 
밝은 달을 어둠에 던진 듯 부끄럽기만 하였네 愧明月之暗投 
 
군자인지 소인인지 알 수 없는 무리들이 괴상한 잡담만을 늘어났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도 천해져서 재물만 좋아하는 것 같았다.  
 
시대 만나지 못한 현사를 저자에서 찾았으나  訪屠狗於市上 
노래 끊겨 슬프더라 누구와 수작할까         悲歌斷兮酬與酬 
풍속과 교화가 시대에 따라 변하더니         俗與化而推移 
사람도 천해져서 재물만 더 좋아하더라       人向下而益偸 
 
그러던 차에 김일손은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郞) 정유(程愈)를 만났다. 정유는 『소학』의 여러 주해를 모은 『소학집설(小學集說)』의 편찬자였다.  
그는 김일손에게 『소학집설』을 주었고, 김일손을 전송하면서 “한유와  구양수 같은 문장가이며 주돈이와 정호·정이천같이 학문의 연원이 있다”고 극찬했다. 

명나라에서 귀국한 김일손은 『소학집설』을 나라에 올렸고 성종은 교서관으로 하여금 인쇄하여 널리 보급하도록 하였다.

1491년 3월 13일에 성종은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육조·한성부 관리 등과 함께 동교(東郊 동대문 밖 교외)의 적전(籍田)에서 모내기를 살폈다. 이때 도승지 김제신·상전(尙傳) 김자원에게 명하여 선온(宣醞 임금이 내린 술)을 내려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홍문관 응교 조지서·정광세, 박사(博士) 김일손(金馹孫)에게 명하여 별선온(別宣醞)을 내려 주게 하였다. (성종실록 1491년 3월 13일) 

한편 3월에 김시습은 다시 관동으로 돌아갔다. 김일손이 지은  「남효온과 같이 설악산으로 돌아가는 김시습을 전송하다 (1491년)」 시가 있다. 
 
삼월 양화진에 한강물 굽이치는데                  三月楊花洌水灣 
조각구름에 학이 날 듯 돌아가는 당신을 보냅니다   片雲孤鶴送君還 
지초와 난초 향기는 추강(남효온)의 방에 스몄으니   芝蘭風入秋江室 
설악산에도 봄 고사리는 나겠구려                   薇蕨春生雪嶽山 

오세 신동의 절개가 바로 정절공(도연명)이군요     五歲神童猶靖節 
백 년의 청렴 선비가 탐욕스런 자 감화시키네       百年淸士可廉頑 
언젠가 지팡이 짓고 금강산에 함께 가거든           聯筇他日金剛去 
봉정의 샘가에서  돌문(은자의 거처)을 두드리리다   鳳頂源頭叩石關 

김시습은 남효온이 사는 행주에 갔다가 양화진에서 배를 탔다. 이때 남효온은 병이 깊어 무척 힘겨워하였다. 김시습은 아마 '우리 추강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였을 것이다. (남효온은 1년 뒤인 1492년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 38세였다) 

김일손은 김시습을 백이숙제와 도연명에 비유하였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대명사였다. 한편 김시습은 김일손에게 기대를 가졌다. '이 사람이 우리의 뜻을 이어갈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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