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무량사의 김시습 자화상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있는 무량사(無量寺)를 답사했다. 무량사는 김시습(1435∽1493)이 1493년(성종 24)에 58세에 생을 마친 곳이다. 극락전과 명부전을 보고 나서 김시습 초상이 모셔진 영정각에 이르렀다. 

무량사 영정각
무량사 영정각

먼저 ‘김시습 초상’ 안내판부터 보았다. 

김시습 초상 (보물 제1497호) 

김시습 초상은 조선 전기 문인이었던 김시습을 그린 것이다. (...)
얼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구색과 짙은 갈색을 사용해서 대비되게 표현하였고, 수염은 섬세하게 검은색으로 그려 당시 초상화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입술, 눈에 어린 총명한 기운에서 김시습의 내면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

그런데 김시습 초상은 김시습이 늙었을 때 손수 그린 자화상(自畵像)이다. 

무량사 김시습 초상
무량사 김시습 초상

1582년에 율곡 이이가 선조의 명을 받아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의 관련 부분을 읽어보자.

“홍치 6년(1493, 성종 24)에 병이 들어 홍산(鴻山) 무량사에서 생을 마쳤으니 그의 나이 59세였다. 화장을 하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절 곁에 임시로 묻었다. 3년 후에 안장하기 위하여 그 빈곽을 열어보니 안색(顔色)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승도(僧徒)들이 놀라 모두 성불(成佛)하였다고 감탄하였으며, 마침내 불교의 예식에 따라 다비(茶毘 화장 火葬) 하였고, 그 뼈를 거두어 부도(浮圖 작은 탑)를 만들었다. 

살아 있을 때 손수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의 두 개의 화상을 그리고, 스스로 찬(贊)을 지었다. 그 찬의 종장(終章)에, ““너의 얼굴은 매우 못생겼고 너의 말버릇은 너무 당돌하도다. 너를 구렁텅에 처넣어 둠이 마땅하다.” 하였다.) (율곡 선생 전서 제14권 /잡저)

김시습이 지은 자화상 자찬(自贊)은 이렇다. 

이하(李賀)를 내리깔아 볼 만큼        俯視李賀
해동(海東)에서 최고라고들 말하지     優於海東 
격에 벗어난 이름과 부질없는 명예     勝名謾譽
네게 어이 해당하랴                   於爾孰逢

사람들은 김시습을 당나라 시인 이하(790∽816)를 내리 깔아 볼 만큼 해동에서 최고라고 추켜세웠다. 이하는 심장을 쥐어짜듯 고음(苦吟 고통스럽게 읊음)하면서 시를 지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사람들은 옥황상제가 백옥루를 낙성하고 기문(記文)을 쓰게 하려고 26세의 이하를 데려갔다고 생각했다. 그는 귀(鬼)를 중심으로 한 환상적인 시들을 남겨 귀재(鬼才 즉 귀신 세계의 시인)라 불렀다.

네 얼굴은 매우 못 생겼고          爾形至藐
너의 말 버릇은 너무도 당돌하도다  爾言大侗
마땅히 너를 두어야 하리           宜爾置之 
깊은 골짜기 속에                  丘壑之中

구학(丘壑)은 은둔자의 거처를 말한다. 김시습은 자화상을 그리면서 골짜기 사이에 있는 느낌으로 그렸다.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돌베개, 2021, p 30-31)

한편 숙종 때의 박태보(1654∽1689)는 ‘김동봉화상찬(金東峯畵像贊)’을 지었다. 그는 “무량사의 동봉 화상은 이율곡이 말한 대로 동봉이 스스로 그린 것이라면서, 김시습이 승려 행각을 했지만 유학자의 옷을 입은 자화상을 그렸고, 좌화(坐化 앉은 채로 입적함)하지 않고 유학자로서 죽었다” 하였다. 

좌화(坐化)는 예법에 어긋나니  
삿자리를 바꾸어 임종하는 일을 나는 알 따름
머리 깎은 승려의 입에서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으랴?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이 죽음에 임박하여 계손(季孫)이 준 대부(大夫)의 삿자리을 까는 것이 비례(非禮)라고 다른 것으로 바꾸게 한 뒤 죽었다. 박테보는 김시습이 불교식 화장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으니, 유학자로서의 죽음을 택한 것으로 보았다. 

초상화를 만고에 남겼으니
승려의 자취는 한때의 더러움이었네
선생의 마음은 
너무도 뚜렷하여 이상할 게 없어라.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p 586-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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