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무량사의 김시습 자화상 (2)

무량사의 김시습 자화상
무량사의 김시습 자화상

부여 무량사에 있는 김시습의 자화상은 검은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모습이다. 《영남야언(嶺南野言)》에는 “화상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절간에 두었다가 홍산현감 곽시(郭翅)가 그 유적을 찾아서 절 옆에 사당을 지어 그 화상을 모시고 제사 지냈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백이(伯夷)의 마음이요, 태백(泰伯)의 행적이라.”하였다.

그런데 김시습의 자화상은 부여 무량사뿐만 아니라 여러 군데에 걸려 있었다. 1668년에 서울 수락산에 들어와 은거한 박세당(1629∽1703)은 1686년에 김시습 영당(지금의 노강서원)을 세우고 무량사에 있던 김시습 영정을 모사해 와서 봉안했다. 김시습 영당은 1701년에 청절사(淸節祠)라는 편액이 내려졌다. (박세당의 차남 박태보(1654∽1689)도 ‘김동봉화상찬(金東峯畵像贊)을 남겼다.) 

강릉의 삼왕촌 영당에도 화상이 걸려 있었고, 춘천(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곡운정사 부근 영당에도 있었다. 곡운의 영당에 있는 화상은 승려 옷차림이나 수염을 기른 모습이었는데 숙종 때 김수종이 ‘화상찬’을 지었다. 

1672년 11월에 송시열은 ‘매월당 화상(梅月堂畫像) 발’을 쓰면서 김수종을 언급하였다. 이를 읽어보자

공자께서 선세(先世)의 성현(聖賢)을 서열(序列)한 것이 많았는데, 오직 머리를 자르고 몸에 문신(文身)하여 왕위(王位)를 양보했던 태백(泰伯 주태왕의 장남)을 거론하여 천하를 삼분(三分)할 만큼 주나라 문왕(文王 태백의 조카)과 아울러 지덕(至德)을 갖추었으니, 선유(先儒)들이 그 뜻이 정미(精微)하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풍속도 옛것을 좋아하여 옛 성현이 남긴 화상을 간직한 이가 많았는데, 이제 김연지(金延之 김수종)가 유독 매월공(梅月公)의 진영(眞影)을 모사(摸寫)헤서는 공이 놀았던 춘천의 산골짜기에 띳집을 짓고 걸어 두었다. 내가 그 진영을 살펴보니, 그 콧수염과 턱수염은 있었으나 갓과 옷은 분명히 승려가 착용하는 것이었다.

내가 일찍이, 율곡 선생이 성교(聖敎)를 받들어 찬술(撰述)한 김시습 공의 전기(傳記)를 읽었는데, ‘공은 소시(少時)에는 유생이 되고 중년에는 승려가 되고 만년(晩年)에는 머리를 길러서 정도(正道)로 돌아왔다가 임종할 때는 다시 두타(頭陀)가 되었다.’ 하였으니, 이는 그 모양이 세 번이나 변한 것인데 유독 이 치상(緇像 승려의 모양으로 된 화상)을 남겨 놓고 스스로 화상 찬(贊)을 지었음은 혹 그사이에 깊은 뜻이 있음이 아니겠는가? 공이 출가(出家)하여 방종한 생활을 한 것은 실로 그 몸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백세(百世) 이후에 그 기상과 정신을 한 조각 화폭(畫幅) 위에서 보아도 그것이 매월공임을 알 수 있다. 

금년 여름에 성삼문공의 신주(神主)가 인왕산 절벽 밑에서 나오자, 경외(京外)의 사부(士夫)가 홍주(洪州)의 노은동(魯恩洞)에 봉안하였으니, 뒷날의 군자가 이 두 분을 나란히 일컫기를 공자의 말과 같이 한다면 어찌 쓸쓸하겠는가. 

김연지(김수종)가 이미 그 대왕고(大王考)인 석실선생(石室先生) 김상헌을 위하여, 도연명의 취석(醉石)ㆍ고송(孤松)ㆍ오류(五柳) 등의 이름을 도산(陶山)에 새겨 두고, 다시 이어서 이번의 일을 나니 그 느낀 바가 깊어서 일 것이다. 

비록 공이 생존해 계실 때에도 7척(尺)의 몸에 불과하였고, 이제는 7, 8촌(寸)의 짧은 비단폭에 옮겨졌지만, 논하는 자들이 “이것이 드러나고 숨고하는 것은 바로 세상 도리에 관계되는 긴요한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임자년(1672, 현종13) 11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송자대전 제147권)

김시습 화상은 18세기에는 경주 천룡사 서쪽 골짝의 ‘매월당’에도 있었고, 19세기 전반에는 설악산 오세암에도 있었다. 

일본 천리도서관에는 도포에 분홍색을 입힌 화상이 전해지고 있고, 경주 기림사 부근 매월 영당에도 완연히 신선 모습을 한 김시습 화상이 있다. 

그런데 김시습의 자화상은 어느 것이 진본이고 어떤 것이 먼저 그려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김시습을 사랑한 후대 사람들은 그의 화상을 베꼈고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그를 형상화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돌베개, 2021, p 30-31, 583-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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