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 문집 편찬   

부여 무량사 입구
부여 무량사 입구

1493년 부여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을 마친 김시습의 시문(詩文)은 거의 흩어져 남아 있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세인(李世仁)이 유고 간행을 중종에게 건의하였고, 이자(李耔) · 박상(朴祥), 윤춘년(尹春年) 등이 시문을 수집하여 간행하였다.

1511년(중종 6) 3월에 이세인이 성종조 문사들의 유고 간행을 아뢰니 중종이 따랐다. (중종실록 1511년 3월 14일)

석강에 나아갔다. 참찬관 이세인이 아뢰었다. 
"지금 글을 숭상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때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갖추어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종조에 문사들을 교육 양성하여 인재가 크게 성했으니, 최숙정·성현·조위·유호인·박은·김맹성·어세겸 같은 이들이 모두 한때의 명현이요, 김시습·남효온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아니지만 또한 한때의 문사입니다. 

그런데 그 문장과 유고(遺稿)가 모두 묻히고 없어져 전하지 않으니, 후대의 사람들이 무엇으로 그 당시 문장이 성했던 일을  알겠습니까? 또 시사(詩詞)는 본래 그 풍요(風謠 지방 풍속을 노래한 것)를 읊은 것으로, 그것으로 풍속이 융성한지 더러운지, 정치가 발전하는지 쇠퇴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니 크게 정치 체제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그것들이 민멸(泯滅)하여 전하지 않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몇 사람의 경우, 그 자손들이 반드시 선인의 유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니, 청컨대 모아 거두어서 편집, 간행하여 전파함이 매우 마땅합니다."


이러자 중종은 "전에 이미 명하여 이 사람들의 문집을 모아 편집하여 개간하게 하였으니, 속히 간행하게 하여야 하겠다." 하였다. 

김시습 부도 (무량사 내)
김시습 부도 (무량사 내)

1521년에 기묘사화로 삭탈관직된 이자(1480~1533)가 충주목사 박상의 도움을 받아 10년간 수집한 매월당의 자필본 시집 3권을 편찬하고 서문을 썼다. 박상은 충주목사 시절에 ‘도연명문집’도 간행한 절의의 선비였다.  

이자는 이색의 후손으로 주계부정 이심원의 제자였다. 그는 150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해 1506년 중종반정 후에 발탁되어 대사헌이 되었다. 1518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이때 정사로 갔던 남곤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것을 지성으로 간호해 회복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이자는 기묘사화 때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자는 1519년에 한성판윤·형조판서·우참찬 등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자도 연좌되어 삭탈관직되었다. 그는 음성·충주 등지에 은거하여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다가 1533년에 병사했다. 저서로는 ‘음애일기’가 있다.

1551년 가을에 윤춘년(1514∽1567)이 김시습의 ‘관동록’과 ‘관서록’을 묶어서 간행했다. 윤춘년은 154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친족인 윤원형에게 아부하여 대사헌이 되었다. 1558년에 이조판서가 되었고, 1565년 예조판서로 있을 때 윤원형이 제거되자 파직당해 향리에 은거하였다. 성격이 경박하고 공명심은 많았으나, 주색을 즐기지 않고 비교적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1567년 10월에 윤춘년이 죽었다. 선조수정실록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5일자에는 ‘윤춘년의 졸기’가 실려 있다. 


“윤춘년이 졸하였다. 춘년은 사람됨이 가볍고 허황하여 스스로 학도들을 모아 놓고 시문(詩文) 강설하기를 좋아하면서 스승으로 자처하였으나, 담론하는 것은 모두 불로(佛老)의 이야기였다. 
그의 말에 ‘성인(聖人)이라는 것은 딴 게 아니다. 다만 천심(天心)과 부합되는 자를 이른 것이다.’하면서 의리(義理)는 따지지도 않고 무엇인가 성사(成事)만 하면 그것으로 천심과 부합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요사하고 허탄하고 속된 전설 같은 것을 말하기 좋아하였으며, 김시습을 추존하여 공자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요승(妖僧) 보우(普雨)가 일찍이 학업에 대해 질문하였는데, 대단히 칭찬하기를, ‘보우는 선(禪)으로 인하여 마음을 깨치고 그칠 곳을 알았으나, 다만 정성(定性)의 경지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하였다. 그의 궤변이 이와 같았다. (...) 윤원형이 패하자 윤춘년 역시 파직당해 시골로 돌아갔다가 병이 발하여 죽었다. (후략)”

이처럼 윤춘년은 김시습을 공자에 비유했다. 이러자 종성 수령이 기괴한 행적의 김시습을 공자에 비유한 것은 부당하다고 비난했다. 
윤춘년은 서신을 보내 “제가 김시습을 성인에 가깝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할 말이 있습니다. 제가 김시습을 ‘동방의 공자’라고 한 것은  그의 행적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가짐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사진 1  부여 무량사 입구

사진 2 김시습 부도 (무량사 내)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