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의 구언교에 대한 이심원의 상소

선릉(성종 능, 서울 강남구 소재)
선릉(성종 능, 서울 강남구 소재)

1478년(성종 9년) 4월 1일에 흙비[土雨]가 내렸다. 성종은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는 것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인데, 경 등은 어찌하여 한마디 말도 없는가?”라며 도승지 이하 승정원 직원들을 꾸짖었다. 

이윽고 성종은 의정부에 전지(傳旨)하였다. 

"하늘과 사람의 이치가 같아 현상(現象)과 본체(本體)는 서로 떨어질 수 없으니, 상서로움과 재변이 감응하는 것은 오직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사리분별에 어두운 내가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공경하고 부지런하며, 임무를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지난 달에는 지진(地震)이 있었고 이번엔 흙비가 내리니, 이런 천재지변이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금이 과중하였는가? 공역(工役)이 번거로왔는가? 형벌이 바르지 못하였는가? 인사가 잘못되었는가? 어질고 뛰어난 이가 혹 등용되지 아니하였는가? 혼인이 때를 놓쳤는가? 수령(守令)의 탐학이 심한데도 감사(監司)의 좌천과 승진보고가 잘못되었는가? 백성들이 고통을 견딜 수 없는데도 백성의 사정이 제대로 보고되지 못하고 있는가?  
허물을 얻은 이유를 깊이 생각하건대 허물은 진실로 내게 있으므로, 직언(直言)을 들어 하늘의 꾸짖음에 응답하고자 한다. 조정 안팎의 대소 신료부터 민간의 소민(小民)에 이르기까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본받아 재변이 일어난 이유와 재변을 그치게 할 방법을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라."
(성종실록 1478년 4월 1일 3번째 기사)  

성종은 스스로 반성하면서 대소신료와 백성들에게 구언을 청한 것이다.  

성종이 구언교(求言敎)를 명한 지 1주일이 지난 4월 8일에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1454∼1504)이 상소를 올렸다. 이심원은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증손으로서 김종직의 문인이었다.

이심원은 먼저 수령의 탐학과 아전의 간사함, 권문(權門) 세족과 그 집안 노비들의 사채(私債)놀이를 금지, 감사(관찰사)를 신중하게 임명하여 그 벼슬에 오래 있게 하면서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제대로 인사 평정할 것을 건의했다. 또한 그는 유능한 유현(遺賢)을 발탁할 것을 건의했는데, 함양현에 사는 정여창, 태인현에 사는 정극인, 은진현에 사는 강응정이 그렇다고 언급했다. 

다음으로 이심원은 공경대부의 사치를 비판하면서, 비판의 칼날을 세조 때부터 권력을 장악해 온 훈구공신에게 겨누었다. 

“전하께서는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모두 어질다고 여기십니까? 어진 이와 어질지 못한 이가 섞였다고 여기십니까? (...) 하지만 지금 전하의 밝음은 세조 임금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의 신하들을 모두 중용하고 계시니, 벼슬을 올리고 내리는 것에 어찌 잘못이 없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세조께서 무인년(1458년)에 예종(睿宗)에게 훈계하시기를, ‘나는 어려움을 당하였으나 너는 태평할 것이다. 일은 세상을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네가 내 행적(行跡)에 갇혀 변통할 줄을 모른다면, 그것은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워 맞추는 격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좌전(左傳)》에 이르기를, ‘사시(四時)의 차례처럼 공업(功業)을 이룬 물러난다.’고 하였고,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신하가 총애(寵愛)와 이익으로 이루어 놓은 공업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그 나라는 영원토록 아름다움을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헤아리소서.”

이심원은 성종에서 대대적인 인적 쇄신을 촉구했다. 세조때부터 권세를  누리고 있는 훈구공신들은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다. 
(성종실록 1478년 4월 8일 4번째 기사)
이러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