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효온의 상소 (1)

경복궁 건춘문

 

이심원이 상소한 일주일 후인 1478년(성종 9년) 4월 15일에 또 한 통의 상소가 올라왔다. 성균관 유생 남효온(1454∽1492)의 상소였다.

“신은 초야(草野)의 백성으로서 성대(聖代)를 만나 태평의 덕화(德化)를 입으니, 개나 말이 그 주인을 사랑하는 정성으로써 강개(慷慨)하여 배운 바를 말하고자 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이달 초하루에 하늘에서 흙비가 내리자 하교(下敎)하였으니, 아아! 상림(桑林)의 육책(六責)과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자신을 반성하고 덕행을 가다듬은 것이 이에서 더할 수 없습니다. 마음 쓰심이 이와 같으니 재이(災異)가 변하여 상서가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정치의 요도(要道)를 묻고 어진 이를 구하시고, 간하는 말에 따르기를 고리 굴리듯 하시고 전대(前代)에 거행하지 못한 예(禮)를 거행하시며,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조서(詔書)와 농사를 권면하는 글을 잇달아 내렸으니 참으로 성군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재이 또한 많습니까? 경인년(1470년 성종 원년) 여름에는 적지천리(赤地千里)이었고, 임진년(1472년)에는 가을에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으며, 정유년(1477년)에는 산이 무너지고 가물며 황충(蝗蟲)이 있었으며, 무술년(1478년)에는 지진과 흙비가 있었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하늘이 성상을 사랑하여 그 덕을 닦게 하는 것이므로, 성주(聖主)는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반성하는 것이 마땅할 줄로 압니다.

신은 어리석고 고루하여 재이(災異)가 일어난 이유와 재이를 막을 방법은 알지 못하나, 귀와 눈으로 보고 들은 바대로 우선 진술합니다.

첫째, 혼인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지금은 혼인하는 즈음에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여 사족(士族)의 자녀가 혼인할 시기를 잃어 원한을 가진 자가 많고, 혹 그 부모가 죽으면 형제와 친족들은 재물에 탐욕을 내어 그 무후(無後)한 것을 이롭게 여겨서 마침내 아내를 두거나 시집가는 것을 못하게하므로 원망하는 기운이 심하여 천지의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혼인에 예물을 보내는 즈음에 사치한 물건을 일체 금지하고, 20세로서 혼인하지 아니하면 부모를 죄책하여 남녀의 예(禮)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수령 선발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수령 선발이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잡과(雜科)의 무식한 무리와 권문(權門)에 뇌물을 주고 얻는 무리가 많이 있어,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어둡고 정사를 돌보지 아니하며, 재물 쓰기를 절약하지 아니하고 백성을 부리기를 때에 맞추지 아니합니다.

흉년이 들면 사실대로 아뢰지 아니하고, 유민(流民)이 굶주리는 것을 고하면 양식을 때맞추어 주지 아니하니, 부잣집에 가서 사채(私債)를 빌립니다. (...) 그렇기 때문에 수령들이 마음대로 탐혹(貪酷)하여 백성의 고혈(膏血)을 착취하니, 의창(義倉)의 많은 속미(粟米)가 반은 사가(私家)로 들어가고 반은 권문(權門)으로 들어가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합니다.

이러니 우리 백성이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먼저 사람을 고르는 것이 중합니다.

우선 이조와 사헌부 그리고 의정부가 살펴서 전하께 올려 전하가 등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옳은 사람을 얻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얻으면 백성의 원망이 사라질 것이고, 백성의 원망이 사라지면 재이(災異)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사람을 쓰는 것과 버리는 것을 삼가는 것입니다. (...) 또 신이 듣건대, 십실(十室)의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 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는데, 산림(山林)의 유일(遺逸)이 어찌 몇 사람뿐이겠습니까?

인재는 성상께서 구하시는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어진 사람과 군자가 조정에 많이 모여 왕가(王家)를 좌우에서 도우면 재이(災異)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궁중의 내수사(內需司)를 없애는 일입니다.

신이 모르기는 하나, 내수사의 재물과 곡식은 우리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 원하건대 전하께서 공명(公明)한 도량을 넓히시어 소민(小民)의 폐(弊)를 밝게 살피시고 빨리 내수사를 혁파(革罷)하고, 노비는 장례원(掌隷院)에 소속시키고, 미곡은 호조에 소속시키며, 기용(器用)은 공조(工曹)에 소속시키고, 재백(財帛)은 제용감(濟用監)에 소속시키소서. ” (성종실록 1478년 4월 15일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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