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5회) 세조, 유응부 · 성승 · 박중림 · 김문기 등을 친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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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5회) 세조, 유응부 · 성승 · 박중림 · 김문기 등을 친국하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3.0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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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니스트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김질이 밀고한 1456년 6월2일의 「세조실록」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다.

나머지 사람들도 다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이조판서 김문기(金文起)만이 공초에 불복(不服)하였다.

그러면 공초에 승복하였다는 나머지 사람들이 누구누구인가? 유응부 · 성승 · 박쟁 · 박중림 · 권자신 · 윤영손 · 송석동 이다.

먼저 무인 유응부(兪應孚, ?-1456)를 살펴보자. 그는 무과에 급제한 후 1449년에 경원도호부사가 되었으며, 1452년에는 의주목사가 되었다. 1453년에 평안좌도 도절제사, 1455년에는 강계도호부사 판사로 주로 변방 장수로 지냈는데, 세조가 즉위하자 중추원 동지사에 임명되어 도성에 있었다. 그는 성승과 함께 별운검으로 임명되었다.

남효온의 『육신전』에는 유응부의 공초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세조가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하려 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신을 청하여 연회하던 날에 일척(一尺)의 검(劍)으로 족하(足下 자네)를 폐하고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으나, 불행히도 간사한 사람이 밀고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하랴. 족하는 속히 나를 죽이시오.” 하였다.

유응부로부터 ‘족하(足下)’라는 말은 들은 세조는 크게 분노했다. ‘나리’라는 말도 비위가 상한데 하물며 아랫사람에게나 하는 칭호인 ‘족하’라고 불렀으니.

세조는 무사로 하여금 살갗을 벗기도록 하며 그 정상(情狀)을 물었으나 유응부는 죄상을 인정하지 않고, 성삼문 · 박팽년 등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생(書生)과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 하더니 과연 그렇도다. ‘지난번 연회를 하던 날에 내가 칼을 시험하려 하니, 너희들이 굳이 저지하며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말리더니 오늘의 화를 당하게 되었구나. 너희들은 사람이면서 계책이 없으니 짐승과 무엇이 다르랴’ 하며, 만약 정상 밖의 일을 듣고자 한다면 저 어리석은 선비에게 물으라.” 하고,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사육신 공원의 ‘사육신 역사관’에 있는 유응부 상

성승은 성삼문의 아버지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경상도 병마절제사가 되었고, 1447년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5년에 도총관이 되었으나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병을 핑계대고 물러났다. 1456년에 중추원 지사에 제수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받아들이지 않고 집에 드러누워서 집안사 람들도 만나지 않았으며, 오직 성삼문과 몰래 이야기 했을 뿐이었다.

박쟁은 1454년에 공조참의를 하였고 1456년에 도총관이 되었는데, 성승 · 유응부와 함께 별운검을 맡았다.

박중림은 박팽년의 아버지로서, 경전(經典)에 정통하여 성삼문ㆍ하위지 등이 그의 문인이었다. 세조가 언젠가 전교하기를, “문종이 세자가 되었을 적에 서연관 최만리·박중림이 옆에서 보필하면서 한 가지의 과실만 있어도 그때마다 간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그 두 신하는 제 직분을 다하였다 할 만하다.” 하였다. 그는 박팽년 등 다섯 아들과 함께 거사에 참여했다. 성승과 성삼문 그리고 박중림과 박팽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권자신(權自愼)은 부친이 판한성부사 권전, 모친은 서운관부정 최용의 딸로서, 문종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동생으로 단종의 외삼촌이었다.

그는 1454년에 우승지가 되고, 1455년 호조참판에 승진되었다.

권자신은 어머니 최씨에게 단종복위 거사를 알렸고, 단종 외할머니 최씨는 이를 단종에게 알렸다. 거사일 아침에도 권자신이 먼저 창덕궁에 나아가니, 단종께서 대도자(大刀子)를 내려 주셨다. (세조실록 1456년 6월7일자)

형조정랑 윤영손(尹令孫 ? ∼ 1456)은 단종의 이모부이고 권자신의 처남이다. 단종복위 거사 시 신숙주를 죽이는 임무를 맡았다.

송석동은 무과에 급제하여 1440년(세종 22) 경원 판관에 제수된 이후 1455년 의정부사인에 올랐고, 1456년에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는데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되었다.

한편 세조의 친국에 오직 이조판서 김문기(金文起 1399∼1456)만이 공초에 불복(不服)했다. 혐의 내용을 극구 부인한 것이다. 1)

김문기는 박팽년의 족친(族親)이었고, 또 친밀히 교제하였다. 그는 1453년(단종 1)에 형조참판 · 함길도 절제사를 했고 1455년에는 공조판서였다. 단종복위 거사 시 김문기는 도진무(都鎭撫)가 되었으므로 박팽년·성삼문과 함께 모의하기를, "그대들은 안에서 일이 성공되도록 하라. 나는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비록 거역하는 자가 있다 한들 그들을 제재하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였다. (세조실록 1456년 6월8일)

1) 한편 김문기 후손이 편찬한 『백촌유사』에는 “국문에 임할 때 선생(김문기)은 혀를 깨물어 답을 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이재호 지음, 조선사 3대 논쟁, 역사의 아침, 2008, p 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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