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의 자탄, 나이 오십에 아들 하나 없으니

백담사 입구(강원도 인제군)
백담사 입구(강원도 인제군)

 

1485년 봄에 김시습은 강원도 진부령(珍富嶺)을 넘어 동해 바닷가로 향하였다. 동해로 가는 길에 독산(禿山 : 민등산이라는 뜻)을 거쳤는데, 거기에는 승려 도안(道安)이 1484년에 지은 독산원(禿山院)이 있었다. 김시습은 도안의 공덕을 찬양하여 기(記)를 써주었다. 이 글은 ‘매월당집’에 남아 있는 유일한 기문(記文)이다.

“관동은 모두가 산이요, 동해에 임하여 지세가 울퉁불퉁 험한 까닭에 길 가는 것이 힘들고 고생스럽다. 독산원은 오대산의 남쪽 성오평(省塢坪)의 경계에 있으면서, 서쪽으로 진부(珍富)를 눌러 쑥과 명아주가 하늘에 치닿았고, 동쪽으로 대관령에 접하여 소나무와 전나무가 해를 가렸다. 매섭게 추울때는 얼음과 눈이 두텁게 깔리고, 여름에 비가 오면 진흙과 모래가 질고 미끄러우므로, 길 가는 사람들이 괴로워하였다. 오대산에 사는 승려 도안이 측은해 하는 마음을 일으켜 저장하고 있던 장물을 모조리 내다가 방 기둥의 앞 뒤 구역과 마구간을 합하여 열네 칸을 짓고 상탑 · 구들 · 삿자리를 모두 갖추었다. 그러자 온 고을 사람들이 그의 선행을 칭찬하였다. 계묘년(성종 14, 1483년)에 착공하여 갑진년(1484년)에 완성하였다. 이듬해(1485년) 봄에 췌세옹(贅世翁)이 이 원(院)을 지나가다가 그 행적을 아름답게 여겨 이 글을 짓는다.”

‘독산원기’에서 김시습은 스스로를 췌세옹(贅世翁)이라 칭하였다. ‘세상에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군더더기’라는 뜻이다. 중국 송나라의 왕초라는 학자가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스스로 ‘췌세옹’이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시습은 세속과 인연을 끊고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이어서 김시습은 도안 스님을 위해 시를 지어주고 길을 떠났다.

세상 벗어나 빛을 감춘 채 도에 언제나 평안하여

가벼운 걸음으로 구름 언덕 첩첩 산을 넘으시네

이제 떠나면 일만 번째, 스스로 웃으시리

삼청(三淸)의 복지(福地 : 절)에 마음대로 소요하면서

여기서 삼청은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최고 이상향인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을 말한다.

1485년에 김시습(1536∽1593)은 나이 오십이었다. 그는 아내도 자식도 없고, 부(富)도 명예도 없었다. 오로지 방랑자 신세였다.

그는 스스로를 탄식하는 시를 지었다.

자탄 (自歎)

나이 쉰이 되었어도 자식 하나 없으니 (五十巳無子)

여생이 참으로 가여워라 (餘生眞可憐)

잘 되고 못 됨을 점쳐서 어쩔 것인가.

사람도 하늘도 원망하지 않으리라.

고운 해가 창호지에 맑게 비치니

깨끗한 티끌이 자리에 날리네.

남아 있는 동안에 더 바랄 것도 없으니

먹고 사는 것이야 편할 대로 맡기리라.

(허경진 옮김, 매월당 김시습 시선, 평민사, 2019, p 85)

한편 김시습은 강릉 한송정(寒松亭)에서 자신을 돌아보아 보며 시를 지었다. 강릉은 김시습의 본향(本鄕)이었다.

십 리에 차가운 소리

사르르 높았다 낮았다

귓전에 불어오누나.

하느님 거처하는 붉은 구름 너머에서

저 균천광악(鈞天廣樂) 연주가 들리는 듯.

평소 호기를

이제 유람에 부쳤거니

만 이랑 파도가 너무도 광활하다.

그 모두를 이 가슴에

삼켰다가 뱉고 펼쳤다가 오므린다.

절구는 돌을 동그랗게 쫀 것

옛 화랑 노닐던 자취

만고에 전하여

바람에 이끼 닳고 찌들었어라.

흐르는 해는 저와 같아

탄환처럼 세월은 빠르게 흘러라

앞 사람을 나와 견주면 지금과 같은 법

가습 북받쳐 긴 노래 뽑을 때

물가 가득히 갈매기가 나는구나.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돌베개, 2021, p 511-514)

한송정 주변에는 차샘, 돌아궁이, 돌절구가 있는데 그곳은 화랑들이 노닐던 곳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릉대도호부’편에 나온다.

“한송정(寒松亭) 도호부 동쪽 15리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했고 소나무가 울창하다. 정자 곁에 차샘[茶泉]ㆍ돌아궁이[石竈]ㆍ돌절구[石臼]가 있는데, 곧 술랑선인(述郞仙人)들이 놀던 곳이다.

o 《악부(樂府)》에 〈한송정곡(寒松亭曲)〉이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는 곡조를 비파(琵琶) 바닥에 써 둔 것이 물결을 타고 중국 강남으로 떠밀려 갔으나 강남 사람은 그 글의 뜻을 몰랐다. 고려 광종 때에 우리나라 사람 장진산(張晉山)이 강남에 사신으로 갔더니 강남 사람이 그 글 뜻을 물었다. 장진산은 시를 지어서 풀이하기를, “달 밝은 한송정 밤이요, 물결 고요한 경포의 가을이라, 슬피 울며 오고가니, 모래 위에 갈매기는 신의가 있도다.” 하였다 한다.

o 이인로의 시에, ‘먼 옛날 신선 놀이 까마득한데, 창창(蒼蒼)한 소나무 홀로 서 있다. 샘 밑에 달이 남아 비슷하게 형용을 상상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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