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효온, 김시습에게 편지를 쓰다 (4)

김시습 부도탑 (부여 무량사)
김시습 부도탑 (부여 무량사)

 

1481년 6월경에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보낸 편지를 계속 읽어보자.

이에 천지에 물어보고 육신(六神)을 참례하고 제 마음에 맹세한 뒤에 모친에게 아뢰기를 “지금 이후로는 군부(君父)의 명이 아니면 감히 마시지 않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까닭은 모친이 술 취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에게 제사 지내고 제육을 받아 음복한다거나 축수를 올리고 술잔을 되돌려 받았을 때에 달고 맛있는 술이 뱃속을 적셔도 어지럽지 않은 경우는 제가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저의 뜻이 대략 이와 같으니, 선생께서 비록 술을 권하는 가르침을 주셨지만 약속한 말을 지키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저의 말은 어길 수 있다 하더라도 제 마음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제 마음은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귀신을 기만할 수 있겠습니까. 귀신은 기만할 수 있다 하더라도 천지를 소홀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를 소홀히 대할 수 있다면 어느 곳에다 이 몸을 두겠습니까.

더구나 어머니께서 아들을 기르며 매양 술을 조심하라고 가르치다가 이 말을 들으시고 기쁜 빛이 얼굴에 감돌았으니, 술을 끊겠다는 맹세를 어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오호라! 술이 깬 굴원(屈原)이나 술이 취한 백륜(伯倫)은 본래 둘이 아니고, 청백한 백이(伯夷)와 조화로운 유하혜(柳下惠)는 결국 하나의 도입니다.

굴원(屈原 BC 343~278)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충신이다. 그는 초나라 회왕을 도와 정치를 했으나, 간신의 참소로 호남성의 상수로 추방당했다. 쫓겨난 그는 상수 연못가를 거닐었는데 한 어부를 만났다.

어부가 굴원에게 ‘무슨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었다. 굴원은 ‘온 세상이 모두가 흐려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깨끗하였고, 뭇 사람들 모두가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이 술에 깨어 있다가 이렇게 추방당한 거라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어부가 “물결 흐르는 대로 살지, 어찌 고고하게 살다가 추방을 당하셨소?”라고 굴원에게 다시 묻자, 굴원은 “차라리 상수 물가로 달려가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葬事)를 지낼지언정 어찌 순백(純白)으로 세속의 티끌을 뒤집어 쓴단 말이오?”라고 답했다.

어부는 빙그레 웃고는 노로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 끈을 씻으리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오.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결국 굴원은 울분을 참지 못해 5월 5일에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졌다. 이는 『초사(楚辭)』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온다.

여기서 ‘탁영(濯纓)’은 ‘갓끈을 씻는다.’는 뜻인데 폭군 연산군에게 능지처사당한 사관(史官) 김일손(1464~1498)의 호가 탁영이었다. 김일손은 ‘세상이 흐림에도 불구하고 갓끈을 씻겠노라’고 호를 ‘탁영’이라 지었다. 하지만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한 대가는 혹독했다.

1498년(연산군 4년) 7월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최초의 사화이다. 사화는 사림의 화란이란 의미인데, 무오사화는 김일손이 쓴 사초(史草)로 인하여 화를 입었기 때문에 무오사화 (戊午史禍)라고도 불린다.

아울러 백륜(伯倫)은 진(晉)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유령(劉伶)의 자(字)로, 그는 술을 몹시 좋아하여 「주덕송(酒德頌)」을 지었다.

한편 맹자는 백이와 유하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이는 성인으로서 맑은 분이고, 이윤은 성인으로서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요, 유하혜는 성인으로서 온화한 분이고, 공자는 성인으로서 시기에 알맞게 하는 사람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 下)’에 나온다.

남효온의 편지는 이어진다.

선생께서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목생(穆生)을 억지로 허물하지 마시고 한 글자로써 가부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목생(穆生)은 전한(前漢) 초원왕(楚元王) 때의 사람이다. 초원왕이 주연(酒宴)을 베풀면서 술을 좋아하지 않는 목생을 위하여 항상 단술을 마련했다고 한다.

중하(仲夏)의 극심한 더위에 삼가 선생의 일상에 만복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연단(鉛丹 묘약)을 제조하는 데 사용하는 신령스러운 복령(茯苓) 한 봉지를 올리오니, 선계(仙界)의 일월을 혼자만 대하지 마시고 베갯속의 『홍보(鴻寶 한나라 회남왕 유안이 베갯속에 비장(秘藏)하였던 도술 서적)』로 야윈 이 몸을 구제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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