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효온, 김시습에게 시를 보내다

부여 무량사
부여 무량사

 

남효온은 그의 저서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서 김시습을 이렇게 적었다.

○ 김시습(金時習)은 본관이 강릉(江陵)이고 신라의 후예이다. 나보다 나이가 20세 위이다. 자가 열경(悅卿)이고, 호가 동봉(東峰)이며, 또 다른 호가 벽산청은(碧山淸隱)ㆍ청한자(淸寒子)이다. (...)

을해년(1455, 단종3)에 세조가 섭정(攝政)하자, 불문(佛門)에 들어가서 설잠(雪岑)이라 이름하고, 수락산(水落山) 정사(精舍)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고 몸을 단련하였다. 유생을 보면 말마다 반드시 공맹(孔孟)을 일컬을 뿐 불법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련하는 것에 대해 물으면 또한 말하려 하지 않았다. (...)

신축년(1481) 연간에 고기를 먹고 머리카락을 길렀다. 글을 지어 조부에게 제사 지냈다. 임인년(1482) 이후로는 세상이 쇠퇴하려는 것을 보고 인간의 일은 하지 않고 여염 간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마다 사람들과 장례원(掌隷院)에서 쟁송(爭訟)하였다. (...)

그가 좋아한 사람은 수천부정(秀川副正) 이정은, 안응세(1455~1480)와 홍유손 그리고 나(남효온)였다. (추강집 제7권 / 잡저)

1480년 이후에 남효온은 수락산에 머문 김시습을 자주 찾았고, 도교 책 『황정경』도 빌려주었다. 그가 지은 「동봉(東峰)께 드리다」 시 2수를 읽어보자.

먼저 제1수이다.

문명을 드날린 삼십 년 동안 文名三十載

서울로 발걸음 들여놓지 않았소 足不履京師

수락 앞에 바위가 드러나고 水落前巖得

봄이 오니 뜰의 나무 제격이라 春來庭樹宜

선사는 부처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禪師不喜佛

제자는 모두 시 짓기를 잘한다오. 弟子摠能詩

스스로 한스러운 일은 이 몸이 묶여 있어 自恨身纏縛

스승을 찾아갈 뜻 이루지 못함이라 尋師意未施

이처럼 남효온은 홍유손, 김일손 등과 수락산에서 기거 중인 김시습을 방문하여 대화하고 시를 지었다. 특히 남효온과 김일손은 1481년 7월에 용문산을 유람하고, 8월에는 원주에서 은거하는 생육신 원호를 함께 방문할 정도로 서로 친했다.

다음은 2수를 읽어보자.

일찍이 산신령과 맺은 약속을 曾與山靈約

어찌 차마 맹세 어기리오? 寒盟可忍爲

한가로운 꽃들이 골짜기에 피는 날 閒花開壑日

이 몸이 그대를 찾아가겠소 老子訪君期

달은 허물 벗는 나방처럼 떠오르고 月上新蛾彀

쌓인 눈이 봄볕에 녹는구려 時春積雪澌

도경(道經)은 이제 모두 베끼셨는지요? 道經知寫否

대낮에 영지는 잘 자라겠구려 白日長靈芝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은 어찌 돌려주지 않습니까. 한 두달 안에 돌려주기로 해놓고는 해가 바뀌었는데도 안 돌려주면 어떻게 합니까?

(추강집 제2권 / 시(詩) ○오언율시 五言律詩)

남효온은 시의 끝부분에 김시습에게 빌려준 『황정 내경경』 책을 돌려 달라고 말했다.

『황정경(黃庭經)』은 중국 동진(317~420)시대의 양생(養生)과 수련(修練)의 원리를 담고 있는 『도덕경(道德經)』,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와 함께 선도(仙道) 수련의 도교 경전이다. 「내경경(內景經)」 1권과 「외경경(外景經)」 3권으로 되어 있다.

황정(黃庭)은 인간의 성(性)과 명(命)의 근본을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뇌(上黃庭), 심장(中黃庭), 비장(下黃庭)을 말한다.

황정경은 명리(名利)를 탐내지 말고 염담(恬淡 ; 욕심없이 깨끗하고 담담함), 무욕, 허무 자연의 마음 상태를 지니라고 가르친다. 또 그러한 상태에 이르러면 기욕을 끊고 호흡을 조절하며 타액을 삼키고 신성(神性)을 길러 정(精)·기(氣)·신(神)을 황정에 응집시키라고 말한다.

당시에 김시습은 이런 도교 사상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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