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강릉 옥에 갇히다.

부여 무량사
부여 무량사

 

1485년에 김시습은 강원도 강릉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는 한 때 강릉 옥에 갇혔던 것 같다. 시대의 반항아 김시습을 감시하는 눈길이 동해안까지 뻗쳤을까?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강릉김씨 김시습이 관향(貫鄕)인 강릉에서 수난을 당한 것이다. 하기야 예수 그리스도도 고향에서 대접을 못받았으니.

김시습은 강릉 옥 벽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아아, 슬프도다! 기린이 나옴은 제 시절 아니었고

그때 서교에서 기린을 잡은 것은 엽사의 과실이었네.

공자가 애도하여 쓰다듬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너를 사슴이라 일컬었으리.

심경호는 『김시습 평전』에서 김시습이 스스로를 기린에 견주었다고 하였다. 아무튼 김시습은 BC 481년에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잡힌 것을 시로 읊었다. 그러면서 공자가 아니었다면 기린은 사슴이 될 뻔했다고 적었다.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p 515-516)

공자는 『춘추(春秋)』에서 ‘애공(哀公) 14년 봄에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을 잡았다(西狩獲麟)'고 적었다.

“애공 14년(BC 481년) 봄에 노나라 서쪽의 대야에서 사냥했다. 거기서 숙손씨의 수레를 모는 서상(鉏商)이 기린(麒麟)을 잡았다. 그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이를 정원 관리인에게 주었다. 이때 공자가 자세히 살펴보더니 ‘기린이다’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기린을 잡아두게 되었다.”

기린은 성군(聖君)을 상징하는 동물로 ‘말의 몸, 소의 꼬리, 솟아난 뿔’로 묘사된다. 기린의 출현은 성군의 출현을 예고하는 매우 상서로운 조짐이었다. 그런데 기린은 성군의 출현을 알린 후에 표연히 사라지는 존재인데, 기린이 사람 손에 잡혔으니 성군이 나타날 가능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공자는 이를 두고 “하늘의 도가 이것으로 무너진게 아닌가?"라며 탄식했다. 이후 공자는 '획린절필'(獲麟絶筆)했다. 즉 기린이 잡히자 글 쓰는 것을 중단한 것이다.

공자는 노나라의 기록을 시간 순서대로 편찬하여 『춘추』란 역사서를 지었는데 『춘추』에는 주나라 주공 14대 후손인 은공 원년(BC 722년)부터 애공 16년(BC 479년)까지의 12공 246년의 역사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기린이 잡힌 후 2년 뒤인 애공 16년(BC 479) 여름에 공자가 죽었다. 『춘추」의 마지막에는 “애공 16년 여름 4월 기축일에 공구가 죽었다”고 짤막하게 적혀 있다.

한편 1486년 무렵 김시습은 강릉 옥을 나온 뒤 양양으로 향하였다.

이 때 김시습은 온작 꽃들이 각각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며 활짝 피어있는 것을 연작시 20수를 지었다.

「현산의 꽃떨기를 노래하다」는 시이다. 현산은 곧 양양의 고려시대 때 이름이다. 김시습은 양귀비꽃, 복사꽃, 연꽃, 난초, 매화, 배꽃, 풀꽃들이 자기에서 사랑스런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온 것으로 생각하며 하나씩 하나씩 시로 읊었다.

제10수에선 꽃들을 현산의 처자로 보았다.

바람이 비단 적삼 헤쳐 고운 살갗이 드러나

창 앞에서 수 놓은 모습 너무나 사랑스럽다.

수놓다 고단하면 바늘 놓고 기지개

양양에서 노래하는 현산의 처자여

제14수에선 김시습이 강릉을 떠나 양양에 이른 사실이 시에 적혀 있다.

아침에 강릉을 떠나 양양에 이르니

천고풍류(千古風流)가 차례로 일어난다.

우연히 꽃밭에 들어가 한송이 꽃을 보니

배시시 웃어 온갖 아양 내보이네

마지막 수 제20수에서는 김시습은 자신을 천금을 가벼이 여기는 대장부로 자처하기까지 하였다.

풍류의 정 물씬하여 억제하기 어려워라

취하여 꽃밭에 들어가 찾고 또 찾아보네

홀연 평상에 앉아 마주보고 웃나니

대장부 본디 천금을 가벼이 여기는 법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p 517- 520)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