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관동에 머문 지 3년이 되다

북한산 중흥사
북한산 중흥사

 

김시습은 동해에서 양양군 부근의 낙진촌(樂眞村)에 머물렀다.버드나무가 늘어선 언덕에 자리 잡은 집 둘레에는 소나무 숲과 대숲이 있었고,

산 새 소리만 이따금 들리는 곳이었다. 거기서 그는 긴 긴 날을 경서 (經書)와 역사서를 펼쳐보다 졸다 하면서 연 줄기에 구멍을 내어 술을 빨아먹으며 취하면서 지냈다.

김시습은 동해 바닷가에 낙진당을 얽은 산관(散官 할 일이 없는 벼슬아치)을 보며, 그 한가한 뜻을 예견하면서도 곧 조정에 들어가 나랏일을 하게 되길 기원하였다. 아마도 그 산관은 승지를 지내다가 늙은 양친을 봉양한다는 이후로 벼슬을 버리고 동해 가에 누웠던 듯 하다.

김시습은 ‘낙진당’이라는 7언 율시 5수를 지었는데, 제2수는 이렇다.

안팎에서 군주와 근심을 나누던 승지의 신하

어이하여 인끈을 버리고 동해가에 누웠나

밀어도 일어나지 않으니 창생은 바란다오

공의 소원은 학발(鶴髮 두루미처럼 백발) 양친 모시는 것

병 핑계로 산림에 처함은 산중재상 도홍경(陶弘景)이고

가난해도 한적함은 진나라 유민 도연명이네

간곡하게 말하오니 그대는 기억하시오

지금은 본성을 즐길때가 아닌 것을

도홍경(陶弘景 456~536)은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나라 학자이다. 그는 일찍이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여 학업에 정진하였으며, 유 · 불 · 도 삼교(三敎)에 능통하였다. 특히 음양오행(陰陽五行) ·역산(曆算) ·지리(地理) ·물산(物産) ·의술본초(醫術本草)에 밝았다. 양나라 무제(武帝)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국가의 길흉 ·정토(征討) 등 대사(大事)에 자문역할을 하여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고 불리었다. (두산백과)

은거시인 도연명은 41세 때에 팽택현령을 사임한 후 재차 벼슬살이에 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때의 퇴관성명서가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그는 전원에 퇴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하여 가난과 병마를 이겨내며 20년을 살았다.

한편 김시습은 가끔 상원사에 가서 잠시 머물며 법석(法席 대중에게 불법을 펴는 자리)에 참여하였다. 상원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의 말사(末寺)이다.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모습이라는 뜻의 야단법석(野壇法席)도 불교용어이다.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란 뜻이고, '법석(法席)'은 '법회석중(法會席中)'의 줄인 말로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다. 즉,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북한산 중흥사 설명문
북한산 중흥사 설명문

 

김시습은 이곳에서 안동고을 수령을 지낸 박아무개와 이별하면서 시 한수를 써주고는 양양으로 향하였다. 김시습이 상원사에서 양양에 돌아왔을 때는 벌써 가을이 깊었다.

김시습은 문득 수락산을 떠난 지 3년이 흘렀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그곳을 벗어나 바닷가로 왔지만 수락산 생활이 자꾸만 생각났다. 「발해(渤海)」라는 제목의 시 3장 가운데 제2장에 그런 심사가 드러나 있다. 발해는 동해 바닷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시는 한 편이 5수로 되어 있는 매우 파격적인 7언 시이다.

내 집은 본래 동성의 동쪽에 있어 (我居本在東城東)

초가의 사면에는 산이 빼곡하고 (茅屋四團山叢叢)

뜰의 나무는 부스스 찬바람에 흔들리네. (庭樹磨戛搖寒風)

떠난 지 3년이건만 돌아가지 못하다니 (而今三載不得返)

잔나비 울고 비 오는 밤 산 집(山堂)이 비었으리 (猿鳴夜雨山堂空)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돌베개, 2003, p 52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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