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설악산에 머물다.

소양정(강원도 춘천시)
소양정(강원도 춘천시)

 

1486년(성종 17)에 김시습(1435-1493)은 양양의 설악으로 들어갔다. 그가 머문 곳은 현재의 양양군 현북면 법수치(法水峙) 부근에 있는 검달동이라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보리와 조 같은 곡식을 심고 농부처럼 살았다. 또 그곳에서 몇몇 머리 깎은 사람들과 벗하며 지냈다.

김시습이 양양부사 유자한(?∽1504)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머리 깎은 이는 본래가 물외(物外)의 인간이요, 산수(山水) 또한 물외의 경계입니다. 몸이 물외에 놀고자 하면 머리 깎은 이와 벗이 되어 산수에 노니는 것이지, 만일 형용은 머리를 깎았는데 몸가짐이 속되다면 그들과는 상대도 하지 않습니다.”

유자한은 1459년에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여러 청 요직을 지내다가 1486년에 양양부사로 부임하였다. 나중에 유자한은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귀양 간 뒤 그곳에서 죽었다.

이 시기에 김시습은 지방 청년들에게 육경(六經)과 자사(子史)를 가르치기도 했으나 제자는 두지 않았다. 청년들 가운데는 성갑이라는 청년과 김효남의 먼 족인이 있었다. 또한 강릉사람 최연이 설악으로 김시습을 찾아가 수학하였다는 일화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려 있다. 『어우야담』을 읽어보자.

“최연은 강릉사람이다. 김시습이 승려가 되어 설악산에 은거한다는 말을 듣고, 젊은 동지 5,6 명과 더불어 그를 좇아 노닐며 글 배우기를 청하였다. 김시습은 모두 사양했으나 최연만은 가르칠 만하다고 여기어 머무르게 하였다. 최연은 반년 동안 사제간의 도리를 다하여 자나깨나 김시습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달이 높이 뜬 깊은 밤에 일어나 보면 매양 김시습이 간 곳을 알 수 없었고, 잠자리가 비어 있었다. 최연은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겼으나 감히 따라가 살펴보지는 못했는데 이와 같은 일이 자주 있었다.

어느 날 한밤중에 달이 또 밝았는데, 김시습이 옷을 입고 두건을 쓰고 는 가만히 나갔다. 최연이 그 뒤를 따라 골짜기 하나와 고개 하나를 넘어가 숲속에서 몰래 엿보았다. 고개 아래에는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었는데 평평하고 넓어서 앉을 만하였다. 너럭바위에는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손님 둘이 앉아 있었고, 그들은 김시습과 서로 마주 앉아 읍을 하고는 대화를 나누었다. 최연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한참 지나서 김시습이 손님과 헤어지는 것을 보고, 최연은 먼저 돌아와 자리에 그대로 누워서 자는 척하였다.

김시습 시 편액(소양정)
김시습 시 편액(소양정)

 

이튿날 김시습이 최연에게 말하였다.

“너를 가르칠만하다고 여겼더니, 이제 네가 얼마나 번거롭고 조급한 지를 알았다. 더 이상 너를 가르칠 수 없다”

그리고서 김시습은 최연을 물리쳤다.

최연은 작별을 하고 떠나 왔는데 김시습과 함께 대화를 나눴던 손님들이 사람인지 신선인지는 끝내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유몽인 지음, 신익철등 4명 옮김, 어우야담, 돌베개, 2006, p 168)

이 일화는 김시습의 신선놀음을 과장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론 그가 제자를 두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실제로 김시습은 ‘와서 공부하겠다는 사람을 거절하며’ 란 시를 남겼을 정도로 제자 들이는 것에 결벽증이 있었다.

명종 때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한 윤춘년(1514~1567)도 「매월당선생전」에서 “선생의 공부는 더욱 깊고 명성도 더욱 멀리 들려서 도를 묻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찾는 것이 천백(千百)을 헤아렸으나 선생은 일부러 미친 체하여 경망하고 조급한 행동을 하고, 혹은 나무나 돌로 치려고 했으며, 혹은 활로 당겨 쏘려고도 하여 그 뜻을 시험하였다.”고 적었다.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돌베개, 2003, p 537–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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