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양양부사 유자한과 교유하다.

춘천 청평사
춘천 청평사

 

먼저 이율곡이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부터 읽어보자. 1582년에 선조 임금은 율곡 이이에게 명하여 ‘김시습전’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이는 『율곡선생전서』 제14권 / 잡저(雜著)에 수록되어 있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요,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 경태(景泰 명 태종 연호) 연간에 영릉(英陵 세종대왕)과 현릉(顯陵 문종대왕)께서 차례로 훙거(薨去)하고 노산(魯山 단종)이 3년 만에 왕위를 손양(遜讓)하게 되었는데 이때 김시습의 나이 21세였다.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단종 양위 소식을 듣고 즉시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다가 방성통곡(放聲痛哭)한 다음에 읽고 쓰던 서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고, 광기(狂氣)를 일으켜 뒷간(화장실)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불문(佛門)에 의탁(依託)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의 호는 여러 번 바뀌어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峰)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생김새는 못생기고 키는 작았으나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며 대범하고 솔직하여 위의(威儀)가 없으며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세(時世)에 분개한 나머지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하였고, 세상을 따라 어울려 살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드디어 육신에 구애받지 않고 세속 밖을 방랑하여 우리나라의 산천치고 그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명승(名勝)을 만나면 곧 거기에 자리 잡았고, 고도(故都)를 찾아가면 반드시 발을 구르며 슬픈 노래를 불러 여러 날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 얼마 안 되어 그의 처가 죽으니, 그는 다시 산으로 돌아가서 두타(頭陀)의 모습을 하였다. 강릉과 양양(襄陽) 등지로 돌아다니며 놀기를 좋아하고, 설악(雪嶽)ㆍ한계(寒溪)ㆍ청평(淸平) 등의 산에 많이 머물렀다.

유자한(柳自漢 ?-1504)이 양양군수가 되어 그를 예로 대접하여 가업(家業)을 다시 일으켜 출세하기를 권하였으나 김시습이 편지로 이를 사절하였다. 그 글의 대략에, “장차 긴 보습을 만들어서 복령[苓]을 캐리라. 온 나무가 서리에 얼어붙으면 중유(仲由)의 온포(縕袍)를 손질하고 온 산에 백설이 쌓이면 왕공(王恭)의 학창(鶴氅)을 매만지려 하네. 뜻을 얻지 못하여 세상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하며 한평생을 보내는 편이 나으니 천년 후에 나의 속뜻을 알아주기 바라네.” 하였다. (후략)”

매월당 김시습이 처 안씨와 사별한 때는 1483년이었다. 이러자 그는 두타의 모습을 하고 관동으로 떠났다. 그는 춘천 청평사에 한동안 머물다가 1486년에는 양양에 머물렀다.

1487년에 양양부사 유자한이 공손하게 예를 갖추어 김시습을 청하였다.

이어서 유자한은 김시습에게 술과 안주를 보내고 쌀을 보내주었다. 이러자 김시습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 친송시와 함께 다음 서한을 보냈다.

“제가 바닷가에서 즐겁게 노닌 지도 벌써 3년이 되었습니다만, 일찍이 관인(官人 관직에 있는 사람)께서 대접해주시는 일도 없었거니와 또한 나아가서 뵙지도 못했으니, 천성이 곧고 도도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이나 무식한 농사꾼들이 저를 ‘말(馬)’이라 부르면 그렇다고 응대하고, ‘소’라고 부르면 그렇다고 응대하여, 스스로 평소의 바람을 이루어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르신으로서의 풍도를 지니신 원님께서 지난번에 공손하게 예를 표하시며, 저 같은 산관(山冠) ·야복(野服)의 존재를 비루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매우 정성스레 말씀 하시는 것을 보니, 참으로 재상의 그릇이요, 빛을 높여 스스로를 양성하시는 분이 분명합니다. 안주와 술을 보내주시고 또 다시 쌀을 보내 주시니, 멀리 바라보며 이제 축수하여 덕을 기려 사례하고, 찬송시 몇 편을 별폭(別幅)에 적어 올립니다. 종이에 가득한 것이 모두 찬송시이오니, 비록 거칠고 졸렬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것을 상자에 넣어두셨다가 후에 자손들에게 적덕(積德 덕을 많이 베품)을 우러러 보는 자료로 삼게 하시기 바랍니다.

(매월당집 권 21, ‘上柳自漢書’ 제1서)

그러면 별폭에 적은 찬송시 한 수를 음미해보자.

산야인의 옷차림에 녹봉 먹지 않는 사람이거늘

어찌하여 나를 불러 ooo

가을 바람은 우수수 베옷 자락에 날리고

서릿달은 삼삼하게 두건을 비추네

마음 맞는 일 없어 개탄만 하던 참에

다정하게 대해주시니 코가 시어 우물거린다오.

물외(物外)에서 도리어 허물 입을 줄 누가 알았으랴.

진세(塵世 먼지 투성이 속세)에 잘못 떨어져 몸만 그르쳤구려

한편 유자한은 김시습에게 흉년의 구황책과 관련하여 상소를 올리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김시습을 양양으로 불러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김시습은 곧바로 초안을 올리려고 하다가, 그냥 총총히 비를 무릎쓰고 산골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산골집에서 초안을 작성하여 보냈다.

청평사 회전문
청평사 회전문

 

김시습의 글을 읽어보자.

“그중에서도 특히 이번에 상소를 편 뜻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으로, 비원(備員 ; 막료, 식객)과 여진(旅進 ; 주견없이 남 따라 진퇴하는 사람)이 취할 만한 뜻은 아니지만, 그러나 진실로 황정(荒政 ; 흉년 구제책)의 요책입니다. 제가 명을 받던 날 곧바로 초안하여 중도에 써 올리려고 했습니다만, 산으로 돌아갈 일이 총총하여 비를 무릎쓰고 그대로 골짝에 돌아와 초가 서재에 앉은 뒤 깊이 생각하고 다듬어 초고를 작성하여 올리는 것이니, 한번 자세히 보시고 취하십시오.” ( 매월당집 권 21, 상유자한서 )

이어서 김시습은 도도한 문장론을 전개하였다.

“대부분 작문에서는 허식으로 말을 많이 하려 하지 말고, 다만 실제의 말을 펴고 엮어서 처음과 끝이 일관되게 해야 하며, 자자구구(字字句句) 정성 어리고 발월(發越 ; 향기를 밖으로 발산함)한 뒤에야 사람의 마음을 감격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제갈량의 출사표와 호전(胡銓)이 고종에게 올린 봉사(상소문)을 보지 않으십니까? 비록 그들은 끝내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지만, 천년 아래에 까지 충성이 뚜렷하게 드러나 ,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제갈량과 호전의 정신이 죽지 않고 밝게 빛나며 저 높이 길이 살아 있음을 알 것이니 이 어찌 작문의 모범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호전(胡銓)은 송나라 노릉 사람으로 고종 때 추밀원편수관으로 상소를 올려 당시 대신(大臣)으로서 금(金)과의 화의를 주장하던 왕륜•진회•손근 3인을 목벨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호전은 적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간신을 처벌하기를 상소한 강직한 사람의 표본이 되었다.

김시습의 글은 이어진다.

“오늘날 과장(科場 과거시험장)의 글은 언뜻 보기에는 훌륭한 듯 하지만 뜻이 없고 그저 이(以) 지(之) 이(而) 호(乎)만 가지고 얕은 뜻을 꾸미므로, 그 말이 비록 입술에 흐른다 해도 그 뜻은 새벽이슬과 봄날 서리처럼 실질이 없습니다. 이것이 한나라 한유(768-824)가 고문으로 돌아간 이유이고 , 송나라 유학자 주자(주희 1130-1200)가 위백양의 『참동계(參同契)』를 선진(先秦)시대의 글과 비슷하다고 하여 발휘한 까닭입니다. 전일에 올린 글은, 생각건대 글은 좋으나 긴요한 말이 없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므로 의론을 전개한 것이 미적미적 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말은 돈독하고 진실함을 다하려고 했습니다만, 영공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자세히 살펴보시고 채택하소서.”

(매월당집 권 21, ‘上柳自漢書’ 제2서)

이처럼 김시습은 문장에서 달의(達意 자기 의사를 잘 드러내어 그 뜻에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됨)를 중시했고, 진정한 속내가 드러나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하여 “ 비록 글은 좋으나 긴요한 말이 없지 않나 싶다”고 겸손해 했지만, 스스로의 글쓰기는 과거 시험장과 다르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돌베개, 2003, p 539-542, 661)

1) 참동계(參同契)는 중국 선종 조동종(曹洞宗)의 개조인 당의 희천(希遷:700∼790) 지은 불교서적으로, 동산양개(洞山良介)의 《보경삼매(寶鏡三昧)》와 함께 조동종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문헌이다. 5언 44구 220자로 분량은 적지만 조동종의 교리를 잘 반영하고 있어 주목된다. 책명은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도교 서적에서 따온 것이며, 삼라만상의 참(參)과 평등실상의 동(同), 그리고 이 둘의 계조융화(契調融和)를 설한다는 뜻을 지닌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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