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남효온을 그리워 하다.

사진 김시습 초상화 (무량사)
사진 김시습 초상화 (무량사)

 

김시습은 양양군수 유자한과 격의가 없어지자 방달(放達 말과 행동이 거리낌 없음)한 천성이 나타나 유자한을 만나면 농담과 익살을 떨었다.

그런데 김시습을 좋아한 유자한은 김시습에게 양양에 정착하여 「장자」를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은 평소에 함께 산수를 즐기던 산승들과 헤어지기 섭섭하므로 산사를 완전히 떠날 수 없음을 완곡하게 말하고, 먼저 산으로 들어가 천불(薦佛)한 뒤에 양양으로 가겠노라고 기별했다.

하지만 유자한은 김세준이라는 사람을 시켜서 김시습이 양양으로 오도록 청하였다. 이번에도 김시습은 거절하였다.

이어서 그는 얼마 전 저녁에 나막신 차림으로 험한 산을 오르다가 지쳐서 병이 났으므로 며칠 후에 만나겠다고 기별하였다.

그런데 김시습을 만난 유자한은 자신의 자제와 조카를 가르치고 함께 벼슬길에 나아가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김시습은 대장부의 뜻을 이루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거절하였다.

하지만 유자한은 김시습에게 가업을 일으키라고 권유하였다. 자기 자제와 함께 과거 공부를 하여 출사하라고 거듭 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은 편지를 써서, 자신의 출생 이후의 행적을 자세히 서술하고 천거를 사양하였다.

“선비는 세상과 모순되면 은퇴하여 스스로 즐기는 것이 대체로 그 본분일 따름입니다. 어떻게 남의 비웃음과 비방을 받아가며 억지로 인간 세상에 머물수 있겠습니까? 금년 농사를 망치고 말았으니 장차 긴 보습을 만들어서 ‘복령(버섯)’과 ‘삽주’의 뿌리를 캐겠습니다. 모든 나무에 서리가 맺힐 때면 (공자의 제자) 자로의 다 떨어진 솜옷을 손질하고, 온 산에 백설이 쌓이면 (진나라 장군) 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 소매가 넓고 가를 검은 빛으로 꾸민 흰색의 웃옷 을 매만지려 합니다. 그리고 뜻을 얻지 못하여 볼 품 없이 세상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하며 한평생을 보내는 편이 낫습니다. 천년 뒤에도 나의 속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엔 유자한은 여자 종을 김시습에게 보내주었다. 그런데 여자 종은 돈만 아는 여자였다. 김시습은 이런 여자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달빛 아래 경치를 구경하는 척 하였더니 그 여자는 떠나가 버렸다. 이러자 유자한은 계집종을 매우 야단쳤다. 이 소식을 듣고 김시습은 미소를 지었다.

한편 산사에서 김시습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시를 짓고 낭낭하게 읊었다. 곁에는 젊은 시절부터 그를 따랐던 선행(善行)이 있을 따름이었다. 김시습은 선행과 윷놀이를 하면서 소일하였다. 그는 윷놀이를 하면서 “윷 나와라”, “모 나와라”하고 큰 소리로 목이 찢어지도록 부르짖었다.

그런데 선행은 다음 해 세모에 더 깊은 산으로 떠났다. 김시습은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선행을 전송하며’ 시를 써주면서 우울해 하였다.

깊은 산으로 가는 너를 보내노라.

깊은 산에는 눈이 많이 쌓였을 텐데

사람 발자국은 아예 없고

짐승만 마주 칠 테지

일만 그루 나무는 창같이 매섭고

일천 봉우리는 소금 같이 희리

산속에 있는 몇 채 집은

높이 매달려 꼭꼭 문 닫고 있고

같이 지낸 선행마저 떠나자 김시습은 서울의 친구들이 그리웠다. 특히 남효온이 보고 싶었다. 1483년에 김시습과 헤어진 남효온은 행주에 들어가 은거하며 농사를 짓고 한가할 때는 남포에 나가 물고기를 잡으며 지냈다.

그는 1485년 4월엔 혼자 금강산을 유람하고 9월에는 이총·이정은·우선언 등과 함께 송도 유람을 떠났다. 송도 유람에서 이들은 태극음양설과 이기설을 토론하며 활발하게 지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벽란도에 갔을 때다. 자신의 처지가 허무하다고 느낀 남효온은 시 두 수를 지었다.

제1수

긴 바람 불어서 흰 갈매기 잠 깨우는데 長風吹起白鷗眠

밤 달 허공에 걸리고 물결 하늘에 닿았네 夜月懸空浪接天

한 시대의 호화로웠던 일 이제는 적막하니 一代豪華今寂寞

장원의 옛날 일이야 생각하매 아득하구나 長源古事思茫然

제2수

늙은 말은 굶주려 울고 해는 저물려는데 老馬飢嘶日欲曛

흰 소금과 조밥에다 무뿌리 썰어 먹네 白鹽粟飯劈菁根

밀물 썰물 오고감은 삶과 죽음 같으니 潮來潮去猶生死

세상의 영고성쇠야 모두 뜬구름 같아라 在世榮枯摠似雲

이 시는 송도 유람기 송경록(松京錄)에 나온다. (한국고전종합 DB, 추강집 제6권/잡저)

그런데 송도 유람을 다녀온 후에 기근이 들었다. 우물이 말라버려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었고, 유리걸식(遊離乞食)으로 온 마을이 텅 비었으며 심지어 자식을 버리는 끔찍한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남효온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가족 역시 극심한 궁핍에 시달렸다. 자식들은 배고팠고, 아내는 자식들을 부둥켜 안고 하늘만 원망했다.

무기력한 남효온은 시만 읊조릴 따름이었다.

산나물 달고 쓴 것 안 가리고 모두 먹으니

아이가 배고파 해도 죽도 끓일 수 없네.

철없는 맹광(孟光)은 성내는 말까지 더 하니

양홍인들 어떻게 속마음 진정시킬까

이런 와중에 열 살짜리 둘째(막내) 아들 종손(終孫)이 학질(瘧疾 말라리아)에 걸렸다. 이즈음에 쓴 남효온의 시가 있다.

병든 아들을 생각하다

약한 체질과 기아 그리고 추위때문에 병마가 침범하니 弱質飢寒致病侵

생각건대 아비가 되어 부끄럽기 짝이 없네 念爲人父媿難禁

아들 녀석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이 밤중 憶渠半夜愁無寐

촌가의 피리 소리는 마음 더욱 놀라게 하네 村笛一聲驚慟心

(한국고전종합 DB, 추강집 제3권 / 시(詩) 칠언절구)

그런데 학질에 걸린 막내아들은 이듬해 2월에 죽고 말았다. 하지만 남효온은 죽은 자식의 시신을 거적으로 싸서 대충 묻은 채 장사조차 제대로 치러주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기엔 너무나 궁핍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두 달이 지나서야 집안 제사에 쓰고 남은 음식이 있어 겨우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이때 남효온은 제문과 시를 지어 막내아들을 저 세상으로 떠나 보냈다.

먼저 제문을 읽어보자.

“종손(終孫)을 제사 지내는 글

성화(成化) 병오년(1486, 성종 17년) 3월 26일에 추강거사가 사람을 보내어 죽은 아들 종손에게 치제(致祭)하노라. 오호라! 네가 태어난 뒤 10년 동안 여름에는 부채가 없고 겨울에는 갖옷이 없었으며, 음식은 겨우 하루에 두 끼이고 거처는 좋은 집이 없었네. 잠잘 때엔 이불과 베개가 없고 앉을 때엔 방석이 없었으며, 죽었을 때는 염습할 옷이 없고 묻힐 때에는 관(棺)이 없었네.

지난해 을사년(1485, 성종16)에 농사에 수확이 없어 온 집안이 울먹이며 나물과 죽을 먹었으니, 굶주림과 추위가 뼈를 침범하여 네가 학질에 걸리고 말았네. 이때 다행히 화를 면했으나 봄이 되어 결국 세상을 떠나니, 거적으로 관을 덮어 볏짚으로 묶었네. 집안에 남은 것을 모두 기울여 한잔 술을 올렸을 뿐이더니, 외로운 혼령은 경경(煢煢)하여 오고 감이 없네.

다음 달 그믐날에 우거하던 집에서 세사(歲事)를 지내니, 술과 쌀이 다섯 되가 되어 술병에 남은 음식이 있었네. 두 그릇을 얻어 너의 무덤에 치제하니, 갈대와 죽순이 점점 가지런해지고 봄꽃이 동산에서 지려 하네. 네가 내 곁을 떠난 지 51일 만에 비로소 제사를 지내니, 아! 네가 저승에 들어감은 금년부터이리라. (한국고전종합 DB, 추강집 제7권 / 제문(祭文) ; 정출헌, 남효온 평전, p 227-228)

이어서 시 3수를 읽어보자

“병오년(1486, 성종17) 2월 6일에 둘째(막내) 아들 종손(終孫)이 죽어 시로써 제사 지내다 3수

제1수

명아주로 기골 삼고 콩잎으로 창자 이루니 藜爲肌骨藿爲腸

(좋은 음식은 먹지 못하고 명아주 잎과 콩잎 같은 거친 음식만 먹었다는 말이다.)

여윈 몸에 키는 석자 남짓 되었을 뿐이라 養得羸形三尺强

풀잎 이슬처럼 살았던 인생 대체 며칠이던가 薤露人生曾幾日

복상(卜商) 같은 신세인 오늘,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네 卜商今日不堪傷

(복상은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이다. 자하는 아들을 잃고 너무 슬퍼하여 시력을 잃었다 한다.)

제2수

천지간에 지나가는 세월 쉼 없이 흐르나니 逆旅光陰冉冉行

지금 사람 옛사람 즐비한 무덤에 묻히도다 今人古人塚纍纍

만물 이치 따져 보건대 내 누구를 원망할까 細推物理吾誰怨

늙은 이 몸이 자식 아끼던 정 잊기 어렵구나. 老大難忘舐犢情

제3수

혼 부르려 종이 잘라 빈 가지에 걸어두니 招魂剪紙掛空枝

무수한 백양 가지가 저녁 바람에 나부끼네 無數白楊颺晩絲

봄바람 맞으면서 너에게 한 잔 술을 붓나니 酹爾春風一桮酒

애비 심정이야 오히려 무덤 속에서 알리라 恩情猶自九原知

(한국고전종합 DB, 추강집 제3권 / 시(詩) 칠언절구)

한편 김시습은 벗이 그리워 「산중에서 친구를 생각하다」 시를 읊었다.

산속에 나무 그늘 울창하여

인적 없이 적막한 때

멀리 바라보며 높이 나는 새를 슬퍼하고

상심하여 먼 곳의 봉우리를 근심한다.

내 남은 인생 늙고 파리하여

부평초 같던 삶을 너절하게 탄식할 뿐

어느 날에야 장안(서울)으로 돌아가 何日長安去

품은 정을 백공(伯恭)에게 말할 수 있을까 情懷話伯恭

백공은 남효온의 자(字)다. 자가 평소에 부르는 이름이라면 호(號)는 존칭이다. 김시습은 서울에서는 19살 연하의 남효온을 항상 추강(秋江)이란 호로 불렀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김시습은 남효온을 백공으로 불렀다. 친밀함이 은밀하게 밀려온 것이다. (이종범 지음, 사림열전 2 순례자의 노래, p 145)

(참고문헌 )

o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돌베개, 2003

o 정출헌 지음, 남효온 평전, 헌겨레출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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