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효온, 1486년에 큰 슬픔을 맞이하다

매월당 김시습 부도

 

김시습의 강원도 생활도 어언 7.8년이 되었다. 그는 기운이 쇠했고,

병도 자주 걸렸다. 더구나 김시습은 외로웠다.

그가 지은 ‘길손이 있다(有客)’라는 시를 읽어보자.

오랑캐 귀신 같은 길손이 있네

주절주절 오랑캐 말을 해대는

제 말에, 스무해 동안

남쪽 북쪽으로 돌아다녔다나.

율무 염주를 주먹에 두르고

쇠털 모자를 머리에 쓰고서

어이해서 본업을 버리고

고생고생 먼 길을 돌아다녔나.

강원도 동해 가에서 지은 ‘길손’ 시는 응답을 잃어버린 외침과 같았다. 이 길손의 모습이 바로 김시습의 자화상이었다.

(심경호 저, 김시습 평전, p 558-559)

사진 김시습 부도 탑 (부여 무량사 입구)

한편 1486년 2월 6일에 막내(둘째)아들을 잃은 남효온(1454-1492)은

3월 16일에 과거 공부를 하던 맏사위 이온언과도 이별하였다. 맏사위는 부친 이손이 부사로 있던 김해로 딸과 함께 내려간 것이다.

얼마나 서운했던지 남효온은 전송 시를 11수나 지었다.

제1수

화숙은 우리 집의 맏사위라

반년 남짓 가난을 맛보았지

이제 이별의 술잔 들이켜며

강변에서 늙은이 눈물 참노라

제2수

영남에 계신 부친께로 떠나가니

표표(飄飄)하기는 천리의 물고기일세

당시에 기둥에다 적었던 뜻 (입신양명하려는 뜻)

끝내 조여(曹蜍)를 부러워하지 않으리.

조여(曹蜍)는 동진(東晉) 조윤(曹胤)의 손자이다. 이지(李志)와 함께 소인배로 불리었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는 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인데도 늠름하게 늘 생기가 있는 듯한데, 조여와 이지는 지금 사람인데도 가물가물 지하에 있는 사람과 같다.” 하였다.

제3수

웅검(雄劍)은 갑 속에서 울어대고

꽃 앞 역참 길 밝기만 하네

가을에 있는 과거에는 부디 응시하여

공명을 소홀히 하지는 마시라

남효온은 사위가 조속히 과거에 급제하길 바란다.

제4수

공명(功名)이 비록 기쁜 듯하지만

반복됨이 한바탕 꿈과 같지

삼자부(三字符) 속에 담긴 참 의미

천년을 쓰더라도 닳지 않으리

삼자부(三字符)는 《주역》 〈복괘(復卦)〉의 불원복(不遠復)을 말한다. 불원복은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다.’는 말로, 불선(不善)임을 알았으면 곧바로 선(善)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제5수

명성과 여색은 성품을 좀먹고

세월은 참으로 나를 속이나니

삼여(三餘)에 모쪼록 학문에 힘쓰고

언제나 〈경지(敬之)〉 시를 외워야 하리

제6수

총명과 민첩함이 뭇사람에 앞서니

전도가 참으로 기대할 만하구나

부친은 옛날의 강락(康樂) 같은 분이라

뒷날 혜련(惠連)이 되기를 기약하네.

강락(康樂)은 남조(南朝) 송나라의 문장가인 사영운(謝靈運)의 봉호(封號)이다. 혜련(惠連)은 사영운(謝靈運)의 족제(族弟)로, 강락과 혜련 모두 문명(文名)이 높았다.

제7수

사람이 누군들 감정이 없으랴만

노경(老境)에는 슬픔과 상심이 많다네.

하물며 지금은 삼춘(三春)이 저물 때라

산마다 꽃이 조각조각 날림에랴

제8수

폐병이 근년 들어 더욱 심해지고

근심 걱정은 나날이 침노해 오네

지난달 봄에 자식 잃은 애통함이

늦은 봄에 그대 보내는 심정일세

남효온의 건강은 매우 안 좋다. 폐병이었다.

제9수

한양 거리에 꽃 떨어지는 이때

수로왕 옛터(김해)에는 봄이 지나가리

돌아가는 노정에 사월을 만날 터

말 머리에 여름이 처음 펼쳐지리라

제10수

봄 안개 피어나 까마귀 둥지 흐리고

강가 모래톱엔 갈대 싹이 가지런하네

이별의 술상이라 단 냉이도 맛이 쓴데

해가 어느덧 한강 서쪽으로 기울었네

제11수

초록빛 푸른 봄날 어느덧 저물고

금관가야 김해 땅은 하늘가에 있네

떠나는 길 아득하고 시력은 짧은데

나는 새만 별안간 눈앞을 지나가네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추강집 제3권 / 시(詩)○오언절구)

그런데 2년 후인 1488년 가을에 맏사위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1488년 9월 초하룻날 문경 새재까지 할 걸음에 달려간 남효온은 망연자실했다.

그는 ‘사위의 영구를 맞이하며’ 시 네 수를 지으면서 진정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시를 읽어보자.

무신년(1488) 9월 초하룻날 사위의 영구가 김해에서 오므로 내가 조령(鳥嶺)의 남쪽에서 맞이하다.

제1수

백년의 인생살이 봄 꿈과 같거늘 百年似春夢

근심 걱정이 꿈속에서도 살아나네 憂患夢中新

강물은 서쪽으로 한없이 흐르고 無限西流水

넋 잃은 이 사람 누각에 올랐네 登樓失意人

제2수

사철 중에 봄이 먼저 지나가고 四時春先去

농사에도 보리를 처음 얻는 법 三農麥得新

이내 인생은 이와 같지 못하여 余生不如此

흰머리 늙은이가 이승에 남았네 留在白頭人

제3수

조령에 가을바람 처음 불어오니 鳥嶺風初落

온 숲이 비단으로 새로 수놓았네 千林錦繡新

남녘 땅 혼백은 처량하기만 하고 凄然南土鬼

북녘서 온 사람은 필마에 의지했네 匹馬北來人

제4수

가을 잎은 뿌리로 돌아가고 秋葉歸根本

누른 국화는 나날이 새롭네 黃花逐日新

나그네 길 이 밤이 또 다하면 征途宵更盡

오가는 사람 여전히 많으리 多少往來人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추강집 제3권 / 시(詩) ○오언절구)

한편 남효온은 1486년) 11월에 부친의 여동생인 고모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시 2수를 지었다. 우씨(禹氏)에게 시집간 고모는 7월에 세상을 떠났다.

제1수

도에다 뜻을 두어 거의 빗장 열었으니 知止開門幾發楗

《수심결》 한 권이 평생 뜻에 합치하였네 修心一訣契平生

《수심결(修心訣)》은 고려 시대 승려인 보조국사 지눌이 마음을 닦는

방법과 마음이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하여 저술한 불교서이다. 고모는 평소에 수심결을 즐겨 읽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오늘 저녁 밤비에 낙엽 쓸쓸히 떨어지니 蕭蕭一葉今宵雨

진루(秦樓)로 떠나가서 피리 소리 들으시리라 去聽秦樓一兩聲

진루는 진 목공(秦穆公)이 그의 딸 농옥(弄玉)을 위하여 세운 누각으로, 봉루(鳳樓)라고 한다. 농옥이 피리 잘 부는 소사(蕭史)에게 시집가서 날마다 그에게 피리를 배워서 봉황의 소리를 내자, 봉황이 그 집에 와서 머물렀다. 목공이 봉루를 지어주어 부부가 그 위에서 머물며 몇 년이나 내려오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봉황을 따라 날아 가버렸다고 한다. 이는 고모가 세상을 떠나 남편을 만났을 것이라는 말이다.

제2수

대가의 착한 덕은 반소와 태사를 엿보았고 大家淑德窺班姒

정씨 집안에 시집 온 뒤로 단약을 이루었네 一入程家丹九成

남효온은 고모의 선한 덕이 반소(班昭)와 태사(太姒)에 견줄 만하고 하였다.

반소는 반표(班彪)의 딸로서 남편 조세숙이 일찍 죽었는데 절행(節行)과 법도가 있었다. 화제(和帝)가 자주 궐내에 불러들여 황후(皇后)와 귀인(貴人)들에게 그를 스승으로 삼아 섬기게 하고 대가(大家)라고 불렀다.

태사는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내이자 무왕(武王)의 어머니로 성덕(聖德)이 있었다.

정씨 집안은 후한(後漢) 정문구(程文矩)를 이르는 듯하다. 정문구의 처는 후덕하여 어질었다. 남편이 죽은 뒤에 전처(前妻)의 네 아들을 친자식 처럼 정성껏 보살폈다. 아마도 남효온의 고모도 전처의 아들들을 친자식처럼 기른 듯하다.

《수심결》과 약화로(藥罏)를 인간 세상에 남겨두니 經卷藥罏遺世上

백양나무에 쇠잔한 비가 명정을 적신다오. 白楊殘雨濕銘旌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추강집 제3권/시(詩) 칠언절구)

1486년은 남효온에게 유난히도 이별이 많고 슬픈 해였다. 1486년(병오년, 성종 17) 섣달 그믐 날 남효온은 공주(公州) 국선암(國仙庵)에서 밤을 새웠다. 그는 암자에서 지내면서 성행 선사(性行禪師)를 위하여 시 한 수를 지었다.

공산의 섣달 그믐 날 밤 한기가 생기는데 公山除日夜生寒

비구들의 범패 소리 물리도록 듣노라 倦聽比丘梵唄聲

따라온 어른과 아이 모두 잠에 빠져들고 從我冠童皆睡着

나 홀로 선승 따라 밝은 새벽 지키노라 獨隨禪衲守天明

남효온은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홀로 깨어 범패 소리를 들으며, 선사(禪師)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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