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효온, 지리산 기행을 하다

정당매 비
정당매 비

충청도 공주 국선암에서 1487년 새해를 맞았던 추강 남효온(1454∽1492) 서울로 돌아가지 못했다. 손자를 잃은 모친과 자식을 잃은 아내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효온은 발길을 남쪽으로 돌렸다.   

그는 충청도 차령고개(차현)을 넘어 정처없이 방랑하면서 어머니를 생각했다.

'차현(車峴)에서' 시를 읽어보자.

차현  푸른 하늘에 닿았는지라           車峴根靑冥
해진 채찍 애오라지 한 번 울리네        弊鞭聊一鳴
아이 종은 미련하여 저녁밥 염려되고     僮頑虞夕爨
조랑말 병들어 외로운 길 한탄하네       馬病嘆孤征

비 내린 뒤라서 산골 풀 젖었고           雨過澗芼濕
잔설이 녹아서 봄물이 생겼구나           雪消春水生
머리 돌려 보니 어머니 계신 곳 아득하니  回頭北堂遠
떠도는 자식 심정 한량이 없어라.          遊子無限情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 추강집 제2권 / 시(詩)오언율시)

잔설이 녹아서 봄물이 흐르고 있다 했으니 1월이 조금 지난 때였으리라.  

남효온은 공주와 은진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이즈음 그의 행적은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집에서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었으리라. 그랬던 남효온은 늦가을에 모친의 분부를 받들고 경상도 의령으로 내려가 고향 친지들을 뵈었다. 처음 찾은 고향은 지친 남효온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의령(宜寧) 고향에서' 시를 읽어보자.

일백 년 전 이곳은 선조가 사시던 곳      一百年前此故居
강물과 구름이 내 고향 생각 돋우누나.     水雲撩我首丘懷
가을 깊어 감과 밤이 익은 자굴산 아래    秋深柿栗闍山下
고향 어른 서로 함께 탁주 잔 들고 오네   父老相持濁酒桮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 추강집 제3권 /시(詩)칠언절구)

감과 밤이 주렁주렁 익어가는 가을에 고향 어른들과 탁주 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상당히 정겹다. 

한편 남효온은 9월 27일에 지리산에 모습을 나타냈다. 9월 27일부터 10월 13일까지 21일간 혼자서 지리산 유람을 한 것이다. 그는 진주 여사동촌에서 출발하여 9월 30일에  천왕봉에 오른 뒤, 칠불사 ·황둔사 ·쌍계사 · 불일암 · 사자암 등을 거쳐 10월 13일에 여사동촌에 도착했다.  그는 외로운 산행을 『지리산 일과(日課)』란 일기체 글을 남겼다.   

남효온에게 지리산 유람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당시 신진 사류들은 너도나도 지리산을 오르면서 호연지기를 길렀다. 먼저 함양군수 김종직이 1472년(성종3년)에 지리산을 올라 '유두류록'을 남겼다. 1489년에는 김일손이 정여창과 같이 지리산에 올랐고, 김일손은 '속두류록'을 남겼다. 

김종직과 김일손의 답사기는 당시 많은 문사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신진사류에게 지리산은 꼭 한번 올라가야 할 명산으로 각인되었다.  

정당매각
정당매각

그러면 남효온은 '1487년 9월 27일'자 지리산 일과를 읽어보자. 

"진주(晉州) 여사등촌(餘沙等村)을 출발하여 단속사(斷俗寺)로 향하였다. 동네입구(洞口)에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는데, 누가 쓴 것인지 모르겠다. 암문(巖門)에서 1리쯤 가니 단속사가 있었다. 천한 사람들의 집과 감나무·대나무가 어우러져 한 촌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큰 가람(伽藍)이 있었다.

그 문에는 '지리산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문 앞에 탄연선사비명(坦然禪師碑銘)이 있으니,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가 짓고 금나라 대정(大定) 12년 임진년(1172, 고려 명종 2) 1월에 세운 것이다. 절 서쪽에는 신행선사비명(神行禪師碑銘)이 있었는데, 당나라 위위경(衛尉卿)을 지낸 김헌정(金獻貞)이 짓고, 원화(元和) 8년(813, 신라 헌덕왕 5) 9월에 세운 것이었다. 절 북쪽에는 감현선사(鑑玄禪師) 통조(通照)의 비석이 넘어진 채로 있었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세속의 무리들이 한 짓입니다" 하였다. 이 비석은 한림학사(翰林學士) 김은주(金殷周)가 짓고, 개보(開寶) 8년 갑술년(974, 고려 광종25) 7월에 세운 것이었다.

절 안 동북쪽 모퉁이에 방 한 칸이 있었는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독서하던 방이다. 절 뜰에 매화 두 그루가 있으니, 전조(前朝)의 정당문학(政堂文學) 강통정(姜通亭 강회백)이 손수 심은 것인데 매화나무가 지난 4, 5년 전에 말라 죽어 그 증손 용휴(用休 강구손, 강희맹의 아들) 선생이 다시 심었다.

나는 탄연선사비명을 읽은 뒤에 안으로 들어가서 주지 성공(聖空)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공은 일암(一庵)의 문인으로, 나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다시 나와서 서쪽과 북쪽에 있는 두 비석을 보고, 다시 들어가서 강용휴가 심은 매화나무를 보았다. 누각 위에 앉아서 고개를 들어 강용휴가 지은 〈종매기(種梅記)〉를 읽었다. 

성공이 나에게 밥을 대접하고 또 나를 따라온 종들에게도 밥을 내주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 주지에게 작별하고 절에서 내려왔다. 조연(糟淵)에 이르러 알몸으로 들어가서 목욕하니, 물과 바위가 맑고 산뜻하였다. 

조연 북쪽에 샘이 있었는데, 바위 표면에서 솟구쳐 나와서 유달리 맑고 시원하였다. 나는 손으로 샘물을 떠서 마셨다.

광제암문으로 다시 나와서 불령(佛嶺)을 넘어 백운동(白雲洞)을 지나갔다. 백운동의 물과 덕천(德川)의 물이 합쳐지는 지점에 태연(苔淵)이 있었다. 태연의 하류는 곧 진주의 남강(南江)이다. 태연을 지나 덕천의 벼랑 위를 따라 10여 리를 올라갔다. 긴 냇물을 내려다보니 확 트이고 시원하여 마음이 상쾌하였다. 

동네 어귀를 지나서 한 마을에 들어섰는데, 양당(壤堂)이라고 하였다.  집집마다 큰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감나무와 밤나무가 뒤덮고 있었다. 사립문에서 닭이 울고 개가 짓는 풍경이 마치 무릉도원이나 주진촌(朱陳村)흡사하다. 

그 오른쪽에 시천동(矢川洞)이 있다. 시천은 진주의 속현(屬縣)이다. 이 현의 아전들은 지리산의 승려가 되기를 바라서 벼슬이 호장(戶長)이나 기관(記官)에 이르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가 체임(遞任)되면 다시 속인으로 돌아오니, 드디어 이것이 오랜 풍습이 되어 고을 수령도 그 풍속을 고칠 수 없었다.

날이 저물어 덕산사(德山寺)에 투숙했다. 이 절은 두 냇물이 합류하는 언덕에 있고, 대나무가 두루 펼쳐져 있다.  왼쪽에 있는 냇물은 웅덩이에 고였다가 다시 흐르는데 용연(龍淵)이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폭포는 떨어졌다가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부연(婦淵)이라 한다.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이 깊었다.

주지 도숭(道崇)은 일찍이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을 만나 선림(禪林)에 이름이 있었는데, 비해당이 정권 다툼에서 패하자 임천(林泉)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나를 만나 담론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였고, 나와 시종들에게 밥을 대접함이 매우 융숭하였다. 이야기가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그의 무리 형유(泂裕), 의문(義文), 의화주(誼化主) 등이 모두 반가운 눈빛으로 나를 대하였다. 이날 40리를 걸었다."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 추강집 제6권 / 잡저 雜著)

이즈음에 추강 남효온은 절친인 홍유손에게 시 2수를 남겼다.  

여경(餘慶)1)에게 부치다 2수

제1수 

가을 저문 두류산엔 낙엽 깊이 쌓였는데   秋晩頭流落葉深
산행에 지닌 것은 오직 한 장 거문고라오  山行惟有一張琴
며칠이나 함께 자면서 반갑게 만났던가    連床幾日逢靑眼
이 밤 등불 앞엔 만리의 그리운 마음일세  此夜燈前萬里心

제2수

세상 인연 사람 속여 반백 머리 새로운데  世緣欺客二毛新
구월이라 된서리에 기러기 떼 날아오네    九月霜嚴鴻雁賓
온 나라 사대부들 예법 갖춘 선비인지라   擧國搢紳皆禮士
완적2) 같은 이내 신세 더욱더 괴롭구려   阮生身世益酸辛
(추강집 제3권 / 시(詩) ○ 칠언절구)

1) 여경(餘慶)은 홍유손(洪裕孫 : 1431~1529)의 자(字)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소총(篠叢) 또는 광진자(狂眞子)이다. 남효온 등과 함께 죽림칠현으로 자처하였다.

2) 완적(阮籍, 210년 ~ 263년)은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 말의 시인이며,  혜강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중심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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