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 13일째인 1498년 7월 23일에 연산군은 김종직이 저술한 『점필재집(佔畢齋集)』을 불사르라고 명령하였다. 7월 24일에 이목이 공초하였다. “신이 김일손에게 준 편지에 ‘형(兄)의 사초는 마침 동방(同房) 성중엄의 손에 있다.’고 한 것은, 신은 첫째 방이고 성중엄은 네째 방 낭청이라 한 방에서 함께 거처하지만, 김일손의 사초는 성중엄의 방에 나뉘어 있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옵니다. ‘당상이 날짜에 따라 기사(記事)를 아니한 것으로 말을 삼아 책(冊)에 쓰려고 아니하므로, 나는 조석으로 성중엄을 문책(問責)하니, 성중엄은
7월 21일에 허반(許磐)이 윤씨의 일에 대하여 또다시 공초하였다. "윤씨의 일은 여종 신월(新月)의 말이 ‘상을 내리는 것이 편벽되게 중하고, 전장과 노복을 많이 내려 주었으며, 집까지 내려주었고 대소의 거둥에 있어서도 반드시 어가(御駕)를 수행하게 하니, 의심스러울 일이다.’ 하므로, 신도 역시 의심이 나서 김일손에게 말해 주었는데, 김일손이 또 부연하여 《실록》에 실은 것입니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1일 3번째 기사) 허반의 공초는 20세에 요절한 성종의 부친인 의경세자(1438∽1457 덕종으로 추존)의 후궁인 소
1498년 7월 21일(국문 11일째)에 실록청 당상 어세겸·이극돈·유순·홍귀달·윤효손·허침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변명하였다. " (...) 듣자오니 어제 오방(五房)의 낭청(郞廳) 강경서·이수공이 권오복 등의 사초(史草)를 취한 것 때문에 모두 형장 신문을 받았다 하는데, 이것은 신 등이 미처 함께 의논하지 못한 바입니다. 강경서 등이 어찌 제 마음대로 취할 수 있사오리까? 신 등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아뢰오니, 바라옵건대 보아주시옵소서."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1일 1번째 기사)이러자 연산군은 추국관들에게
1498년 7월 20일에 심문을 담당하는 추관(推官)이 최부가 김종직의 문집을 소장한 지가 3년에 이르렀는데도 초사(招辭)에 ‘겨를이 없어 펴 보지 못했다.’ 한 것은 사기(詐欺)이며, 홍한과 표연말의 사초(史草)는 아울러 속셈이 있는데도, 표연말은 또 ‘처음에 조의제문의 뜻을 해석하지 못했다.’ 한 것은 바르지 못한 말이며 김종직을 칭찬한 것도 역시 반드시 속셈이 있다고 여기어 각각 형장 심문을 한 차례씩 하였는데, 모두 승복하지 아니하였다. 또 실록청 편수관 강경서가 ‘권오복·권경우의 사초를 보지 못했다.’고 말한 것도 사기라고
1498년 7월 20일에 표연말이 공초하였다. "신의 사초(史草)에 ‘소릉(昭陵)을 꼭 헐지 않아도 되는데 헐었다.’고 한 것은 문종께서 승하하신 뒤에 헐어버렸기 때문이며, 조의제문으로 말하면 글 뜻이 험하고 궁벽하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였사옵고, 김종직의 행장에 도덕과 문장을 극구 칭찬한 것은 김종직의 가슴속에 쌓인 포부를 비록 알리지는 못했을지라도 한 시대 사람들이 다 일컫기 때문에 신이 행장에다 이처럼 칭찬한 것이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0일 1번째 기사) 먼저 소릉부터 살펴보자. 소릉은 문종의 비이자 단종의
1498년 7월 20일, 국문 9일째이다. 이 날 허반과 표연말 그리고 정여창이 공초하였다. 먼저 허반(許磐)이 공초하였다. "신의 처음 초사(招辭)에 ‘회간왕(懷簡王 덕종 :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 1437∼1457)의 상(喪)을 끝마친 뒤에 세조께서 권씨에게 육식(肉食)을 권했는데 권씨가 먹지 아니하니 상이 노하시자 권씨가 달아났다.’는 일은 집안에서 항상 말해 오기로 신이 이를 김일손에게 말했다 하였사온데, 그 실상인즉 당초에 윤씨의 일을 말할 때에 권씨의 일까지 연속해서 말하였기 때문에 말이 오가는 사이에 착오가 생겨서 김일
1498년 7월 12일에 의금부 관원 홍사호 등이 김일손의 집에서 수색한 잡문서 중에서 이목(李穆 1471∼1498)이 김일손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이목의 편지를 읽어보자. "목(穆)이 실록청(實錄廳)에 출사(出仕)한 것이 이제 수십 일이 되었습니다. 형의 사초(史草)가 마침 동방(同房)인 성중엄의 손에 있었는데, 당상(堂上)이 날마다 쓰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모두 책에 쓰려고 하지 않는다 하기에, 내가 아침저녁으로 성중엄을 책하니, 성중엄도 사람이 군자(君子)이기 때문에, 마음에 감동되어 오히려 김일손의 사초가 한 자
1498년 7월 19일 10번째 기사는 계속된다.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정석견의 ‘단지 목록만 보고 그 글을 보지 못했다.’는 그 말도 바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마는, 전라도는 사무가 하도 많으니 진실로 펴 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오며, 또 그가 김종직에게 붙지 않은 내용은 유자광이 잘 알고 있사옵니다.”정석견(1444∼1500)은 1474년(성종 5)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을 지냈고, 1485년에 이조좌랑에 올랐다. 149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1495년(연산군 1)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병조참의를 역임했다
1498년 7월 19일에 연산군은 윤필상 등과 사초 사건의 관련자들의 처벌에 대해 의논하였다. 연산군은 정석견등의 초사(招辭 범죄사실 진술조서)을 보고 전교하였다. "표연말·이원은 진실로 죄가 있거니와, 정석견이 말하기를 ‘김종직의 시집(詩集)을 펴 볼 겨를이 없었다.’ 하였는데, 이 말은 어떠냐? 그 나머지 사건 관계자는 모조리 석방하는 것이 어떠하냐? 이주의 말한 바는 반드시 내용이 있으니 신문(訊問)해 보라."이러자 윤필상 등이 서로 상의하여 아뢰었다. “채수·이창신·김심 세 사람은 당연히 석방해야 합니다. 김전(金詮)은 당연
1498년(연산 4년) 7월 17일에 연산군은 이주를 문초할 것을 전교하였다."이주도 역시 김종직의 제자다. 그가 간관(諫官)이 되었을 적에 일찍이 ‘성종은 나의 임금이온데 장차 어떻게 성종을 지하에서 뵈오리까.’ 하였으니, 그도 아울러 문초하도록 하라."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8번째 기사)이틀 후인 7월 19일에 추국관이 이주를 심문했다. "네가 성종을 일러 ‘내 임금이다(吾君)’ 했다는데 지금 임금은 유독 네 임금이 아니란 말이냐?"이주가 말했다. "《맹자》에 ‘내 임금이 놀지를 못하면’이란 글이 있고, 또 ‘내
1910년 8월 29일에 나라가 망하자 고종 황제는 ‘덕수궁 이태왕’ 전하가 되어 덕수궁(이전의 경운궁)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가 1911년 7월에 별세했다. 새옹지마랄까? 1912년 5월에 복녕당 양씨가 덕혜옹주를 낳았다. 61세에 딸을 본 고종은 세상 사는 맛이 났다. 1914년 7월에는 광화당 이씨가 이육을 낳았고, 1915년 8월에는 보현당 정씨가 이우를 낳았다. 늦게 두 아들을 얻은 고종은 더욱 기뻤다. 그런데 1916년 1월에 이육이, 7월에는 이우가 죽었다. 이 시기 다섯 살 덕혜옹주가 유치원에 입학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은 일제에 강점되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해도 황실은 ‘한일 병합조약’ 제3조에 의거 예우를 받고 세비(歲費)도 받았다. 순종은 ‘창덕궁 이왕’으로,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으로 격하되었지만 평생 잘 살았다. 10월 10일에 조선총독부는 특별회계 세출예산 외에 이왕가(李王家)의 세비 금(金) 50만 원(圓)을 지출하였다. (순종실록 부록 1910년 10월 10일)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따르면 이왕가에게 지급한 세비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매년 150만 엔(현시가로 198억 원)이었다. 1921년
1498년 7월 19일에 실록청에서 아뢰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5번째 기사) "홍한의 사초(史草)에는, ‘세조께서 화가(化家, 화가위국 化家爲國의 준말)를 꾀하고자 하여 음으로 무사(武士)와 결탁했다.’ 하였고, 신종호의 사초에는 ‘노산(魯山 단종)의 난(亂)에 정창손이 맨 먼저 계창하여 벨 것을 청했으니, 노산이 비록 세조에게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정창손이 몸소 섬기었는데, 차마 제창하여 베자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표연말의 사초에는 ‘소릉(昭陵 단종의 생모인 문종 비의 능)을 헌 일들은 문종에게 저버림
# 국치일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 서울 남산 밑 일본인 거주지에는 집집마다 일장기가 게양되고 시내 곳곳에는 오색등이 설치되어 저녁에 있을 등불 행렬을 준비했다. 일본이 동원한 인파 약 6만여 명은 총독부를 비롯한 총독 · 정무총감 · 경무총감 · 군사령관의 관저 앞에서 만세 삼창을 하며 대한제국이 조선으로 바뀐 것을 축하했다. 이 날 종로 거리의 한국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장사를 하고 흥청거리며 먹고 마시는 평소의 모습을 보였다. (김태웅·김대호 지음,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2019, p 433)
1910년 8월 22일에 체결한 을 살펴보자. “
1498년 7월 13일에 연산군은 어서(御書)를 내려 “탄(坦)이라는 선사(禪師)가 정분(鄭苯)의 시구(屍柩)를 보호한 일을 썼는데,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느냐?”고 김일손에게 물었다. 이에 김일손은 공초하였다. "난신(亂臣) 등을 사절(死節)로 쓴 것은, 황보인·김종서·정분 등이 섬기는 바에 두 마음을 갖지 않았으니, 제왕이 마땅히 추앙하고 권장할 일이기 때문에 정분을 들어 전조(前朝)의 정몽주에게 비하였고, 또 황보인·김종서를 쓰면서 절개로 죽었다 한 것입니다.” 정분(1394~1454)은 1452년(단종 즉위년)에 김종서의 천거
1910년 8월 4일 밤 11시에 총리대신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를 방문했다. 신소설 『혈의 누(血─淚』)>의 작가로 잘 알려진 이인직은 28세인 1900년 2월에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 정치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고마쓰는 이 학교 국제법 교수였다. 1903년에 이인직은 한국 정부의 유학생 소환령을 거부하고 미야코 신문사의 견습 기자로 일하다가 일본 육군성 통역으로 들어가 1904년 러일전쟁 때 종군했다. 이후 그는 1906년 2월에 송병준이 창간한 일진회의 기관지 주필이
1498년 7월 19일, 사초 사건의 주모자 김일손의 행적에 대하여 이종준이 공초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3번째 기사) 이종준은 김일손과 친했다. 그는 김일손이 아끼는 거문고 ‘탁영금’에 학(鶴)을 그려주기도 했다. “병오(丙午)·정미(丁未) 연간(1486-1487년)에 신이 내자직장(內資直長 종7품)이 되고 일손이 내섬 직장(內贍直長 종7품)이 되었사온데, 하루는 성종 임금께서 후원에 납시어 활 쏘는 것을 구경하옵기로, 신과 일손이 설비를 맡게 되었습니다.” (내자시(內資寺)는 왕실에서 소용되는 각종 물자를 관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이 망했다. 1909년 초부터 일본은 한국의 병탄 논의를 구체화했다. 고종 퇴위 이후 2년간 병탄이 유예된 것은 항일 의병 투쟁 때문이 아니라 열강들의 승인이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1909년 3월에 일본 수뇌부는 한국 병합을 결정했다. 4월에 총리대신 가쓰라와 외무대신 고무라는 일본에 일시 귀국한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한국 병합에 합의했다. 6월에 각의는 이토를 경질하고 후임에 소네 아라스케를 임명했다.7월 6일에 일본 각의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 병합을 단행한다.’는 내용의 ‘한국 병합에 관한 건’
1498년 7월 19일에 이극돈의 상소를 읽은 연산군은 이극돈의 소(疏)를 추관(推官 중죄인을 심문하는 관원)에게 보이며 "이 소(疏)가 어떠하냐?"며 의견을 물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9번째 기사) 이러자 한치형, 노사신, 유자광이 아뢰었다. 먼저 한치형이 아뢰었다. "이극돈은 동료로서 신의 집에 자주 내왕하므로 신은 묻기를 ‘《실록》에 선조(先朝)의 허망한 사실을 기록했다고 전해 들었는데, 그런 사실이 있는가?’ 하니, 이극돈은 말하기를 ‘있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장차 어떻게 처리할 작정이냐?’ 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