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 7월14일에 의금부가 이목의 집을 수색하여 발견한 임희재(任熙載)의 편지를 읽은 연산군은 “그 아비 임사홍(任士洪)이 소인으로서 금고(禁錮)를 입었는데, 이 사람도 역시 그렇단 말이냐. 아울러 그 아비까지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전교하였다.조선 시대 간신의 대명사로 낙인찍힌 임사홍(1445∼1506). 그는 금수저였다. 아버지는 좌리공신 임원준, 아내는 효령대군(1396-1486)의 손녀였다. 1)2) 또한 네 아들 중 큰 아들 임광재는 예종의 딸인 현숙공주에게 장가들어 풍천위(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7년(연산군 3년) 2월 이후 대간들의 대신에 대한 비판은 몇 달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7월4일에 사헌부 집의 강경서 등이 대신이 책임만 회피하려고 하니 ‘절에서 죽이나 먹고 있는 승려’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러자 7월6일에 좌의정 어세겸, 우의정 한치형, 좌찬성 이극돈, 우찬성 성준, 좌참찬 유지, 우참찬 윤효손, 영중추부사 정문형이 사직을 청했다.연산군은 어서(御書)를 내려 “지금의 천변은 모두가 나의 부덕한 소치이니, 간관의 논박을 혐의로 여기지 말라”고 하였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 7월14일에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찾아 올 적에는 아울러서 그 집의 문서까지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4일 4번째 기사)이러자 의금부는 이목(1471∼1498)의 집을 수색하여 임희재(1472~1504)가 이목에게 준 편지를 발견했다. 이목은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설치된 실록청에 근무하면서 성중엄에게 김일손의 사초를 실록에서 누락해서는 안 된다고 엄중 경고한 선비로, 1492년(성종 23년) 12월에 영의정 윤필상(1427∼150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연산군 재위 3년(1497년) 1월16일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이러자 1월25일에 사헌부 장령 이수공이 경연에서 아뢰었다."16일 밤에 뇌성하는 변이 있었는데, 전하께서 하교하시길 재변이 아니라고 하여 신등은 깜짝 놀랐습니다. ... 윤씨는 폐비(廢妃)인데도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모셨으며, ... 삼공(三公)은 음양을 섭리하고 그 아래인 찬성(贊成)은 교화를 넓혀야 하는데 지금 모두 사람답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삼정승과 좌 · 우찬성이 ‘사람답지 않다’는 이수공의 표현은 지나치게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5년(연산군 1년) 9월15일에 대간들은 노사신을 영의정에서 체직시키고 부원군으로 내려 앉히는 1차적 목표를 달성했지만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대간들은 노사신이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도록 탄핵을 계속했다.9월16일에 사간원 정언 한훈은 노사신을 경연에 참가하지 말도록 아뢰었다. 9월26일에 사간원은 대간의 간언을 들을 것과 노사신 등의 죄를 처단하라고 상소했다. 9월28일과 10월1일에도 한훈은 거듭 노사신이 경연에 참여하지 말도록 거듭 아뢰었다.결국 노사신은 11월1일에 원상에서 해면을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5년 (연산군 1년) 7월28일에 대간이 다시 아뢰었다."노사신 같은 간신을 끝내 제거하지 못한다면, 신들이 감히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연산군은 전교하였다."임금을 미혹하고 나라를 그르친 후에 제거해도 늦지 않다."대간이 또 아뢰었다."옛사람의 말에 ‘미세할 적에 방비하고 조짐부터 막아야 한다.’ 하였으니, 임금을 미혹시키고 나라를 그르친 뒤에 구원하려 하면 역시 늦은 것입니다. 지금 노사신의 말을 전하께서 믿고 계시니, 임금을 미혹시킨 것은 이미 징험이 되었습니다만, 나라를 그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5년 8월1일, 2일, 3일에도 대간은 노사신의 죄를 극렬하게 논하였으나, 연산군은 들어 주지 않았다. 대간은 사직으로 항의 표시를 했다.연산군은 복직을 명하였지만 대간은 또 사직했다.8월4일에 훈구대신 윤필상이 나섰다.“전하께서 속히 결단하셔야 하겠습니다."연산군은 불쾌했다."대간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내가 대간을 교체하려 한다."윤필상이 또 아뢰었다."대간은 복직하지 않을 것이며, 대간을 교체하더라도 다음에 들어올 대간이 어찌 간언하지 않고 물러가겠습니까. 조정이 오래도록 안정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5년 7월22일에 대간은 합사(合司)하여 노사신의 죄를 여러 번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오히려 대간을 공박했다. "경들이 중의(衆意)를 수합해 보라고 청하였지만, 의논하는 자가 마음속으로는 그르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대간의 입을 두려워하여 옳지 않다고 한다면, 경들이 이것을 빙자하여 더욱더 강력하게 말할 것이 아니냐. 이러니 듣지 않는 것이다.(중략)대간은 이기려고만 힘써서, 비록 남이 한 말이 옳을지라도 자기 의사와 맞지 않으면 논박하기 때문에, 대신의 의논도 다 자유롭지 않다. 이로 미루어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5년 7월19일에도 삼사는 "전하께서 대의로써 결단하시어 노사신을 빨리 귀양 보내소서."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연산군일기 1495년 7월19일 1번째 기사)이 날 영의정 노사신이 사직을 청했다. 그는 사직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생각하옵건대, 선유(先儒)의 말에 ‘정권은 하루라도 조정에 있지 않아서는 안 된다. 정권이 조정에 있지 아니하면 대간(臺諫)에 있고, 대간에 있지 아니하면 궁위(宮闈)에 있게 된다. 정권이 조정에 있으면 나라가 다스려지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연산군 시대에 삼사(三司)와 대신은 번번이 대립하였다. 1) 원래 대신과 삼사는 기능상 서로 긴장하는 관계였지만, 이 시기는 심각한 상황이었다.삼사와 대신의 갈등은 1498년 12월 28일 연산군 즉위 전부터 수륙재(水陸齋)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삼사(三司)는 유교적인 의례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륙재 실시에 반대했지만, 좌의정 노사신은 연산군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고, 우의정 신승선(연산군의 장인)은 잠자코 말이 없다가 ‘나의 생각도 또한 노사신의 말과 같다.’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1494년 1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연산군 즉위 초기에 수륙재 문제를 제기한 삼사는 외척 등용과 비리에 대하여도 문제를 제기했다. 1495년 2월11일에 연산군은 이철견을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로, 윤탄을 동지의금부사로 임명했다.(연산군일기 1495년 2월11일 3번째 기사)다음 날 지평 최부가 다양한 논거를 들면서 즉각 반대했다. 1)"이철견이 전일에 판의금부사로 있을 적에 정호(鄭灝)의 첩 종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서 갖은 방법으로 위협 공갈하여 곧 빼앗아 간음하였으므로 이 일이 말썽이 되어 파직을 당했고, 윤탄은 충청감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5년 1월25일에 승지 권경우가 의금부에서 유생을 추국한 안(案)을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연산군은 “조유형은 상소문을 주장하여 지었고, 정희량과 이자화는 혹 기초(起草)하고 혹 정서(正書)하였으니, 어찌 먼저 발언한 자를 모르랴. 만일 다 말하지 않는다면 형신(刑訊)하라”고 전교하였다.1월26일에 대간·홍문관이 유생의 추국과 형 집행이 불가함을 간청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이 날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조유형 등의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신 등은 깊이 대행 대왕께서 양육하신 은혜를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4년 12월29일에 연산군(1476∼1506)이 18세에 조선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1) 이 날 성균관 및 사학(四學)의 유생(儒生)들이 대궐문 밖에서 곡림(哭臨)하였다. 이어서 성균관 유생 조유형 등이 수륙재를 지냄은 효도가 아니니 금지를 청하는 글을 올렸다. 연산군은 "조종조부터 의례(依例) 행해 온 일이다."라고 하면서 좇지 않았다. 한편 장령 강백진, 정언 이의손이 “수륙재에 대한 대간의 간언을 금지한 데 대해 실망한다.”고 아뢰었다. 이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 7월13일에 연산군은 『실록』 열람에 대하여 전교하였다.“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에서 『실록』을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는데, 평시라면 이 말이 타당하다. 그러나 지금 큰일을 상고하려고 하는데 완강히 불가하다고 하니, 이는 반드시 어떤 사정(事情)이 있어서다. 의금부(義禁府)에 내리어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이러자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사(合司)하여 아뢰기를,“예로부터 임금은 사초(史草)를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홍문관·예문관은 직책이 사관(史官)을 겸대하였으므로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7월13일에 김일손은 노산대군(단종 1441∼1457, 재위 1452∼1455)의 일에 대하여 공초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3일 3번째 기사)“사초(史草)에 이른바 ‘노산(魯山)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최맹한(崔孟漢)에게 들었습니다.신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서 쓰기를 ‘김종직(金宗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 7월13일에 김일손은 권람·남효온 등의 일에 관하여 공초하기를,“노산(魯山)의 숙의(淑儀) 권씨의 노비와 전산(田産)을 권람(權擥)이 다 차지했다.’고 한 것은, 권씨는 바로 권람의 족종(族種)인데도 종 한 사람, 밭 한 이랑조차 나누어 주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신은 그 사람됨을 경박히 여겨서 쓴 것이옵니다.” 1)단종의 후궁 권씨는 1457년 6월 21일에 백성 김정수의 고변으로 역적이 된 권완의 딸이다. 2)백성 김정수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데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윤필상 · 유자광 등은 빈청에서 김일손에 대한 문초를 계속했다. 김일손은 사초에 기록된 권람 · 남효온 등의 일에 관하여 공초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3일 2번째 기사) 김일손은 공초하기를, "순(舜)임금의 아비 고수(瞽瞍)와 우(禹)임금의 아비 곤(鯀)이 모두 악덕(惡德)이 있었는데, 우(虞)·하(夏)의 사관(史官)이 책자에 직서(直書)를 하였으며, 또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를 찬수하시는데 오직 정공(定公)·애공(哀公)에 한하여 미사(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 7월12일에 시작된 김일손의 공초는 7월13일에도 계속되었다.7월13일자 연산군일기에는 (1) 사초 사건에 관한 김일손의 공초 내용, (2)사초에 기록된 권람 · 남효온 등의 일에 관한 김일손의 공초 내용, (3)사초에 기록된 노산 대군(단종)의 일에 대한 김일손의 공초 내용, (4) 실록 열람에 대한 왕의 전교가 실려 있다.먼저 7월13일 1번째 기사부터 살펴보자.연산군이 어서(御書)를 내려 김일손에게 묻기를,“1. 『실록』이라는 말이 무엇을 이른 것이냐? 만약 『실록』이라 한다면 마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 7월 12일에 김일손은 “또 이른바, ‘영응대군 부인 송씨(? ~ 1507년)가 군장사(窘長寺)에 올라가 법(法)을 듣다가 시비(侍婢)가 잠이 깊이 들면 승려 학조(學祖)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것은 박경(朴耕)에게 들었다.’고 공초하였다.박경은 즉시 끌려왔다. 박경은 공초하기를, “신은 정유(丁酉) 연간에 사경(寫經)의 일로 봉선사(奉先寺)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동대문(東大門)에 방(榜)이 붙기를,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중 학조와 사통을 했다.’ 하였기에, 신은 이것을 김일손에게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7월12일에 의금부 경력 홍사호 등은 김일손이 공초한 것을 연산군에게 서계(書啓)하였다.“사초에 ‘중 학조(學祖)가 능히 술법으로 궁액(宮掖 대궐 안에 있는 하인)을 움직인다.’ 한 것은, 대개 해인사(海印寺)는 본시 차정(差定 임명)된 주지(住持)인데 학조가 내지(內旨)를 칭탁하고 그 권속으로써 노상 지음(持音)을 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또 ‘대가(大家)와 교통한다.’ 한 것은, 학조가 광평대군(廣平大君)·영응대군(永膺大君)의 전민(田民)을 많이 얻었기 때문이고, 또 이른바, ‘영응대군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