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의 강원도 생활도 어언 7.8년이 되었다. 그는 기운이 쇠했고,병도 자주 걸렸다. 더구나 김시습은 외로웠다.그가 지은 ‘길손이 있다(有客)’라는 시를 읽어보자.오랑캐 귀신 같은 길손이 있네주절주절 오랑캐 말을 해대는제 말에, 스무해 동안남쪽 북쪽으로 돌아다녔다나.율무 염주를 주먹에 두르고쇠털 모자를 머리에 쓰고서어이해서 본업을 버리고고생고생 먼 길을 돌아다녔나.강원도 동해 가에서 지은 ‘길손’ 시는 응답을 잃어버린 외침과 같았다. 이 길손의 모습이 바로 김시습의 자화상이었다.(심경호 저, 김시습 평전, p 558-559)사진
김시습은 양양군수 유자한과 격의가 없어지자 방달(放達 말과 행동이 거리낌 없음)한 천성이 나타나 유자한을 만나면 농담과 익살을 떨었다.그런데 김시습을 좋아한 유자한은 김시습에게 양양에 정착하여 「장자」를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은 평소에 함께 산수를 즐기던 산승들과 헤어지기 섭섭하므로 산사를 완전히 떠날 수 없음을 완곡하게 말하고, 먼저 산으로 들어가 천불(薦佛)한 뒤에 양양으로 가겠노라고 기별했다.하지만 유자한은 김세준이라는 사람을 시켜서 김시습이 양양으로 오도록 청하였다. 이번에도 김시습은 거절하였다.이어서 그는
먼저 이율곡이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부터 읽어보자. 1582년에 선조 임금은 율곡 이이에게 명하여 ‘김시습전’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이는 『율곡선생전서』 제14권 / 잡저(雜著)에 수록되어 있다.“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요,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 경태(景泰 명 태종 연호) 연간에 영릉(英陵 세종대왕)과 현릉(顯陵 문종대왕)께서 차례로 훙거(薨去)하고 노산(魯山 단종)이 3년 만에 왕위를 손양(遜讓)하게 되었는데 이때 김시습의 나이 21세였다.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단종 양위 소식을
1486년(성종 17)에 김시습(1435-1493)은 양양의 설악으로 들어갔다. 그가 머문 곳은 현재의 양양군 현북면 법수치(法水峙) 부근에 있는 검달동이라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보리와 조 같은 곡식을 심고 농부처럼 살았다. 또 그곳에서 몇몇 머리 깎은 사람들과 벗하며 지냈다.김시습이 양양부사 유자한(?∽1504)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머리 깎은 이는 본래가 물외(物外)의 인간이요, 산수(山水) 또한 물외의 경계입니다. 몸이 물외에 놀고자 하면 머리 깎은 이와 벗이 되어 산수에 노니는 것이지, 만일 형용은 머리를 깎았는데
김시습은 동해에서 양양군 부근의 낙진촌(樂眞村)에 머물렀다.버드나무가 늘어선 언덕에 자리 잡은 집 둘레에는 소나무 숲과 대숲이 있었고,산 새 소리만 이따금 들리는 곳이었다. 거기서 그는 긴 긴 날을 경서 (經書)와 역사서를 펼쳐보다 졸다 하면서 연 줄기에 구멍을 내어 술을 빨아먹으며 취하면서 지냈다.김시습은 동해 바닷가에 낙진당을 얽은 산관(散官 할 일이 없는 벼슬아치)을 보며, 그 한가한 뜻을 예견하면서도 곧 조정에 들어가 나랏일을 하게 되길 기원하였다. 아마도 그 산관은 승지를 지내다가 늙은 양친을 봉양한다는 이후로 벼슬을 버리
1485년에 김시습은 강원도 강릉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는 한 때 강릉 옥에 갇혔던 것 같다. 시대의 반항아 김시습을 감시하는 눈길이 동해안까지 뻗쳤을까?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강릉김씨 김시습이 관향(貫鄕)인 강릉에서 수난을 당한 것이다. 하기야 예수 그리스도도 고향에서 대접을 못받았으니.김시습은 강릉 옥 벽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아아, 슬프도다! 기린이 나옴은 제 시절 아니었고그때 서교에서 기린을 잡은 것은 엽사의 과실이었네.공자가 애도하여 쓰다듬지 않았더라면영원히 너를 사슴이라 일컬었으리.심경호는 『김시습 평전』에서 김시
김시습이 남효온에게 보낸 「추강의 시에 화운하여」 시 4 수중 제3수와 제4수를 계속 읽어보자.제3수듣건대 그대가 근력을 수고롭혀 聞子勞筋力장래에 큰일을 하려한다 들었소만, 方將大有爲부디 운각의 책들을 모두 읽어 須窮芸閣袠부디 계수나무 꽃계절을 저버리지 마시게. 莫負桂香期김시습은 남효온에게 운각의 책 즉 교서관에서 간행하는 책들을 모두 읽어 과거에 응시하라고 조언한다.계향기(桂香期)는 계수나무 꽃향기가 풍기는 계절, 즉 과거 보는 시절이란 뜻이다. 예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계수나무 가지를 꺾는다고 하였다. 문득 베를린 올림픽 마
남효온의 「동봉(東峰)께 드리다」 시 2수를 받은 김시습은 「추강의 시에 화운하여」 시 4수를 지어 남효온에게 보냈다. 시를 읽어보자.제1수우습구나 하릴없는 자들이 堪笑消(磨)子나를 승려의 스승이라 부르네 呼余髡者師소년 때는 유학이 심히 좋더니 少年儒甚好만년에는 묵씨(불승)이 마땅하네 晩節墨偏宜세간의 하릴없는 사람들이 김시습을 승려의 스승이라고 비웃지만, 내 속내를 누가 알 것인가. 나는 소년 시절엔 유학을 좋아했고 지금은 불교 승려라네.가을 달 밝으면 석 잔 술 마시고 秋月三桮酒봄바람 불면 시 한 수 짓는다오 春風一首詩좋은 사람
남효온은 그의 저서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서 김시습을 이렇게 적었다.○ 김시습(金時習)은 본관이 강릉(江陵)이고 신라의 후예이다. 나보다 나이가 20세 위이다. 자가 열경(悅卿)이고, 호가 동봉(東峰)이며, 또 다른 호가 벽산청은(碧山淸隱)ㆍ청한자(淸寒子)이다. (...)을해년(1455, 단종3)에 세조가 섭정(攝政)하자, 불문(佛門)에 들어가서 설잠(雪岑)이라 이름하고, 수락산(水落山) 정사(精舍)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고 몸을 단련하였다. 유생을 보면 말마다 반드시 공맹(孔孟)을 일컬을 뿐 불법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말하지
1481년 6월경에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보낸 편지를 계속 읽어보자.이에 천지에 물어보고 육신(六神)을 참례하고 제 마음에 맹세한 뒤에 모친에게 아뢰기를 “지금 이후로는 군부(君父)의 명이 아니면 감히 마시지 않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까닭은 모친이 술 취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신에게 제사 지내고 제육을 받아 음복한다거나 축수를 올리고 술잔을 되돌려 받았을 때에 달고 맛있는 술이 뱃속을 적셔도 어지럽지 않은 경우는 제가 어찌 사양하겠습니까.저의 뜻이 대략 이와 같으니, 선생께서 비록 술을 권하는 가르침을 주셨지만
1481년 6월경에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보낸 편지는 계속된다.이런 까닭으로 『서경(書經)』에 술을 경계하는 〈주고(酒誥)〉가 실려 있고,『시경(詩經)』에 〈빈지초연(賓之初筵)〉이 있으며, 양자운(揚子雲)이 이로써 〈주잠(酒箴〉을 지었고 범노공(范魯公)이 이로써 시를 지었으니, 제가 어찌 술잔을 조용히 잡고서 향음주(鄕飮酒와 향사(鄕射)의 사이에서 진퇴하고 읍양(揖讓 읍하며 사양함)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빈지초연(賓之初筵 손님 잔치)은 『시경(詩經)』에 실려 있다. 잔치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탈선하는 행동이 흔함을 경계하는 시로서,
1481년 6월경에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보낸 편지를 계속 읽어보자.“이런 까닭으로 『서경』에 술을 경계하는 「주고(酒誥)」가 실려 있고, 『시경』에 「빈지초연(賓之初筵)」이 있으며, 양자운(揚子雲)이 이로써 〈주잠(酒箴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고 범노공(范魯公)이 이로써 시를 지었으니, 제가 어찌 술잔을 조용히 잡고서 향음주(鄕飮酒 고을 사람들이 때때로 모여 술을 마심)와 향사(鄕射 활쏘기)의 사이에서 진퇴하고 읍양(揖讓 읍하는 동작과 사양하는 동작)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서경(書經)』은 오경(五經) 중의 하나로, 중국 상고
1481년 6월경에 남효온은 절주(節酒)하라는 김시습의 편지에 대한 답신을 썼다.동봉산인(東峰山人 김시습의 호)에게 답하는 편지지난번에 선생께서 더할 수 없는 호의를 베푸시어 산중에서 저를 전송하며 멀리 호계(虎溪)를 건너오셨으니 은혜와 영광이 몹시 깊었습니다.호계(虎溪)는 중국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 앞에 있는 시냇가이다. 진(晉)나라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이곳에 있으면서 손님을 보낼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문득 호랑이가 울었다.하루는 그가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이야기하다가
1481년 2월에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은 남효온은 김시습과 술에 관한 서신을 몇 차례 주고 받았다. 김시습의 『매월당집』에는 편지 3통이, 남효온의 『추강집』에도 편지 한 통이 수록되어 있다.그러면 『추강집』 ‘제4권’에 수록된 편지를 읽어보자. 먼저 동봉산인(東峰山人) 김시습이 남효온에게 보낸 편지이다.그저께 선생(남효온을 말함)을 모시고 천석(泉石) 위에서 노닐며 종일토록 서성이다가 청계(淸溪)에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맑은 흥취가 다하지 않았건만 작별이 갑작스러웠으니 얼마나 야속했는지 모릅니다.봉별(奉別)한 이후로 지금 며칠이
남효온은 김시습과 친하게 지낸 홍유손, 그리고 성균관에서 만난 김일손과 함께 수락산을 가끔 찾았다. 김시습·남효온·홍유손·김일손은 만나면 술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談笑)했다.한번은 김시습이 남효온에게 “나는 선왕(先王)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벼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만, 선생은 이와 다르니 세도(世道)를 위하여 한번 나아감이 옳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에 남효온은 소릉(단종의 모친 묘소)이 복위된 뒤에 응시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김시습은 또다시 말하지 않았다.한편 남효온은 엄청 술을 좋아했다. 애주
남효온은 수락산에 사는 김시습을 자주 찾았다. 남효온이 쓴 시가 있다.수락산으로 청은(淸隱 김시습의 호)을 찾아가다 길을 잃었다. 30리쯤 갔을 때에 계곡의 근원이 비로소 다하고 길에 드리워진 복숭아 열매가 있었다. 가지를 휘어잡아 열매를 따서 먹으니 주린 배가 불렀다.1수온종일 험한 길 걸어 개울 하나 건너니 竟日崎嶇渡一溪저녁 바람이 기이한 새 울음 불어 보내네 晩風吹進怪禽啼산길 다한 바위 모퉁이의 복숭아꽃 나무 山窮石角桃花樹가을 열매 주렁주렁 나그네 향해 드리웠네 秋實離離向客低2수맹수들 막 지나가 발자국 마르지 않았는데 虎豹新過
김시습(1435-1493)과 남효온(1454-1492)은 언제 처음 만났을까? 이는 분명하지 않다. 김시습이 19세 연하인 남효온에게 ‘추강’으로 존칭을 쓰는 것을 보면, 남효온이 진사 시험에 합격한 1480년(성종 11년) 이후에 만난 듯하다.1480년이면 김시습이 서울 수락산(水落山)에서 10여 년 정도 기거하고 있던 때였다. 김시습은 경주 금오산에서 머물다 1471년(성종 2년) 봄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1472년 가을부터 수락산 노원 지역, 지금의 노원구 상계동에서 터를 잡은 듯하다. 그는 이곳에서 직접 흙을 만져 농사
1485년 봄에 김시습은 강원도 진부령(珍富嶺)을 넘어 동해 바닷가로 향하였다. 동해로 가는 길에 독산(禿山 : 민등산이라는 뜻)을 거쳤는데, 거기에는 승려 도안(道安)이 1484년에 지은 독산원(禿山院)이 있었다. 김시습은 도안의 공덕을 찬양하여 기(記)를 써주었다. 이 글은 ‘매월당집’에 남아 있는 유일한 기문(記文)이다.“관동은 모두가 산이요, 동해에 임하여 지세가 울퉁불퉁 험한 까닭에 길 가는 것이 힘들고 고생스럽다. 독산원은 오대산의 남쪽 성오평(省塢坪)의 경계에 있으면서, 서쪽으로 진부(珍富)를 눌러 쑥과 명아주가 하늘에
매월당 김시습의 ‘동봉육가’ 제4수부터 제6수를 계속 읽어 보자.제4수어머니, 맹자 어머니 같으셨던 어머니나를 기르며 고생하고 집을 세 번 옮기셨지요.일찍이 공자를 배우게 하셔서경학으로 요순시대를 회복하라 기대하셨지요.有孃有孃孟氏孃 유양유양맹씨양哀哀鞠育三遷坊 애애국육삼천방使我早學文宣王 사아조학문손왕冀將經術回虞唐 기장경술회우당어찌 알았으랴 유생이란 이름이 나를 그르치어십 년을 외지로 분주하게 나다닐 줄을아아 네 번째 노래! 우울하고 답답한 이 노래골짜기에 우는 까마귀는 제 어미를 먹이건만.烏知儒名反相誤 오지유명반상오十年奔走關山
1485년에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동해 바닷가에 머물렀다. 이즈음에 그는 ‘동봉육가(東峰六歌)’를 지었다. 모순에 찬 자신의 모습을 회고한 자전적 시 ‘육가’는 본래 그가 존경했던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와 송나라의 절의파 문인 문천상(1236∼1282)의 시 형식을 이용한 것이다.그러면 ‘동봉육가’를 읽어 보자.1.나그네여, 동봉이란 이름의 나그네여헝클어진 흰머리에 초라한 모습스무살도 못 되어서 글과 칼을 배웠지만시큼한 선비 꼴은 되고 싶지 않았다네.有客有客號東峯 유객유객호동봉鬖䯯白髮多龍鍾 삼발백발다용종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