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8년 4월 15일에 성종은 성균관 유생 남효온이 올린 상소를 승정원에 보냈다. 도승지 임사홍이 아뢰었다."소릉(昭陵 단종 모친의 늘)을 복위하라는 것은 신하 된 자로서 거론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남효온이 마음대로 거론하였으니 옳지 못합니다."이러자 성종이 전교하였다."소릉을 이제 다시 논의함은 부당하다.“이어서 임사홍이 아뢰었다."이 상소는 이심원의 상소와 같습니다. 이심원이 경연(慶延)과 강응정을 천거하였는데 남효온도 경연을 추천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남효온의 무리에 강응정·정여창·박연 등과 같은 이가 있습니다.
1478년(성종 9년) 4월 15일, 남효온 상소의 마지막 부분은 소릉 복위 였다. (성종실록 1478년 4월 15일 3번째 기사)“여덟째로, 소릉(昭陵)의 능호를 복위하는 것입니다. (소릉은 문종 비(妃)이자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 권씨의 능이다.현덕왕후는 단종을 1441년 7월 23일에 낳은 후 하루 만에 산후통으로 23세에 운명하였다.)신이 삼가 살피건대, 세조 대왕은 하늘이 준 용지(勇智)로써 일월(日月)같은 밝음을 가지시고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얻어서, 큰 어려움을 깨끗하게 타개하여 집을 나라로
1478년(성종 9년) 4월 15일에 성균관 유생 남효온이 올린 상소는 계속된다. (성종실록 1478년 4월 15일 3번째 기사)“일곱째 풍속을 바루는 것입니다. 사도(司徒 교육자)의 벼슬이 폐지되고부터 풍속이 날마다 야박하여지고, 시서(詩書)의 교육이 해이해지면서부터 옛 풍속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헌의(獻議)하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풍속이 날마다 야박해지는 것은 시세(時勢)가 그러한 것이다. 세상의 도가 점점 떨어지고 인심이 경박하여 풍속이 옛날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늙은 자가 다시 젊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1478년(성종 9년) 4월 15일에 혼인, 수령의 선발, 내수사의 폐지 등을 건의한 24세의 성균관 유생 남효온의 상소는 계속된다. (성종실록 1478년 4월 15일 3번째 기사)“다섯째, 무당과 부처를 물리쳐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무당은 삼풍(三風: 무(巫)·음(淫)·난(亂)의 세가지 나쁜 풍속)가운데 그 하나이며, 부처는 본래 서역(西域)의 교(敎)인데, 옛 제왕은 모두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보탬이 없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음사(淫祀)를 섬기면 복이 없
이심원이 상소한 일주일 후인 1478년(성종 9년) 4월 15일에 또 한 통의 상소가 올라왔다. 성균관 유생 남효온(1454∽1492)의 상소였다.“신은 초야(草野)의 백성으로서 성대(聖代)를 만나 태평의 덕화(德化)를 입으니, 개나 말이 그 주인을 사랑하는 정성으로써 강개(慷慨)하여 배운 바를 말하고자 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이달 초하루에 하늘에서 흙비가 내리자 하교(下敎)하였으니, 아아! 상림(桑林)의 육책(六責)과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자신을 반성하고 덕행을 가다듬은 것이 이에서 더할 수 없습니다. 마음 쓰심이 이와
1478년(성종 9년) 4월 8일,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1454∼1504)이 올린 ‘세조의 훈구 공신은 물러나야 한다’는 상소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는 훈구 공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4월 9일에 성종은 창덕궁 선정전에서 이심원을 만났다. 성종 : "상소 중에서 ‘세조 조의 훈신(勳臣)을 쓰지 말라.’고 한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 네가 무슨 마음을 가지고 말하였는가?"이심원 : "대저 창업하는 임금은 뜻이 성공하는 데에 있으므로 비록 한 가지의 재예(才藝)를 가진 자라도 모두 거두어 쓰나, 수성(守成)하는 임금
1478년(성종 9년) 4월 1일에 흙비[土雨]가 내렸다. 성종은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는 것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인데, 경 등은 어찌하여 한마디 말도 없는가?”라며 도승지 이하 승정원 직원들을 꾸짖었다. 이윽고 성종은 의정부에 전지(傳旨)하였다. "하늘과 사람의 이치가 같아 현상(現象)과 본체(本體)는 서로 떨어질 수 없으니, 상서로움과 재변이 감응하는 것은 오직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사리분별에 어두운 내가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공경하고 부지런하며, 임무를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지난 달에는 지
1493년 부여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을 마친 김시습의 시문(詩文)은 거의 흩어져 남아 있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세인(李世仁)이 유고 간행을 중종에게 건의하였고, 이자(李耔) · 박상(朴祥), 윤춘년(尹春年) 등이 시문을 수집하여 간행하였다.1511년(중종 6) 3월에 이세인이 성종조 문사들의 유고 간행을 아뢰니 중종이 따랐다. (중종실록 1511년 3월 14일)석강에 나아갔다. 참찬관 이세인이 아뢰었다. "지금 글을 숭상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때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갖추어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종조에 문
부여 무량사(無量寺)의 김시습 초상을 보고 나서 천왕문을 나왔다. 오른 편에는 김시습 부도(浮圖)가 있다. 1493년 봄에 김시습은 유언하기를,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매장하라.” 하였다. 그런데 3년 뒤에 무덤을 파보았더니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고 한다. 승려들은 그가 틀림없이 부처가 되었다고 여겨 다비(茶毗 화장)를 행하였다. 그때 사리 한 점이 나와 사리를 봉안하는 부도탑을 1495년에 세웠다. 김시습 부도는 오른편에는 부도가 있고, 왼편에는 매월당 시비(詩碑)가 있다. 먼저 ‘부도 안내판’부터 읽는다.
부여 무량사에 있는 김시습의 자화상은 검은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모습이다. 《영남야언(嶺南野言)》에는 “화상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절간에 두었다가 홍산현감 곽시(郭翅)가 그 유적을 찾아서 절 옆에 사당을 지어 그 화상을 모시고 제사 지냈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백이(伯夷)의 마음이요, 태백(泰伯)의 행적이라.”하였다.그런데 김시습의 자화상은 부여 무량사뿐만 아니라 여러 군데에 걸려 있었다. 1668년에 서울 수락산에 들어와 은거한 박세당(1629∽1703)은 1686년에 김시습 영당(지금의 노강서원)을 세우고 무량사에 있던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있는 무량사(無量寺)를 답사했다. 무량사는 김시습(1435∽1493)이 1493년(성종 24)에 58세에 생을 마친 곳이다. 극락전과 명부전을 보고 나서 김시습 초상이 모셔진 영정각에 이르렀다. 먼저 ‘김시습 초상’ 안내판부터 보았다. 김시습 초상 (보물 제1497호) 김시습 초상은 조선 전기 문인이었던 김시습을 그린 것이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구색과 짙은 갈색을 사용해서 대비되게 표현하였고, 수염은 섬세하게 검은색으로 그려 당시 초상화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1493년(성종 24) 봄에 김시습(1435∽1493)은 무량사 선방 청한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이 58세였다. 「무량사에서 병으로 눕다(無量寺 臥病)」 시가 있다. 아마 평생 마지막 시였을지 모른다. 봄비 줄기차게 흩뿌리는 이삼월인데 春雨浪浪三二月 급작스런 병을 견디며 선방에서 일어나 앉는다 扶持暴病起禪房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물으려 해도 向生欲問西來意 다른 스님들이 행여 알까 두렵네 却恐他僧作擧揚 폭병(暴病)은 뜻하지 않은 병이라는 의미이다. 김시습은 간혹 아프긴 했지만 오랜 방랑으로 몸은 다져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1491년 3월에 관동으로 돌아간 김시습은 1492년 가을에 서해안 명산을 돌아다녔다. 아마 단종의 초혼각이 있는 계룡산 동학사에서도 며칠 머물렀으리라. 이후 그는 무량사(無量寺)로 향하였다. 무량사는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570m) 기슭에 자리잡은 사찰이다. 김시습은 무량사에서 지희(智熙)선사를 만났다. 김시습과 지희는 옛 친구였다. 남효온이 지은 ‘표훈사(表訓寺 금강산 만폭동 萬瀑洞에 있는 절) 주지 지희(智熙) 스님께 드리다’ 시가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 추강집 제2권 /시(詩) ○오언고시 五言古詩)
1490년(성종 21) 9월에 김일손(1464∽1498)은 남효온(1454∽1492)과 함께 북한산 중흥사에서 머물고 있는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을 찾아갔다. 세 사람은 백운대에 오르고 담소하면서 5일 동안 함께 지냈다.10월에 김일손은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고, 11월에는 진하사(進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다. 1489년 겨울 요동질정관(遼東質正官)으로 북경에 간 이후 두 번째 북경행이었다. 서장관(書狀官)은 정사와 부사를 보좌하며 사행의 기록과 보고를 담당하는 직임인데, 하급 관원에 대한 규찰을 담당하는 행
1487년(성종 18) 9월에 김일손(1464∽1498)은 노모 봉양을 위해 진주 목학(晉州牧學) 교수를 청하여 나갔다. 나이 24세였다. 1488년 3월엔 진주목사 경태소등 21인과 촉석루에서 수계하고 서문을 지었다. 이어서 함양남계에 가서 일두 정여창(1450∽1504)을 만났다. 이즈음에 김일손은 함안에 사는 생육신 조려(趙旅 1420~1489)를 찾았다. 조려는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서 태어났는데 1453년(단종 1)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런데 1455년에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그는
1486년 10월에 김일손(1464∽1498)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김일손은 1482년에 준손, 기손 두 형과 함께 정시(庭試)에 나갔으나 일부러 병을 핑계대고 시험을 보지 않았다. 이때 두 형은 과거에 합격했다. 1483년에 김일손은 부친상을 당했고 1485년까지 상복을 입었다. 1486년 7월에 김일손은 초시, 8월에 복시에 합격했다. 9월에 식년 정시(式年 庭試) 초시에 수석 합격한 후에, 10월 복시에 책문 대중흥책에 제1등으로 합격하고, 전시 친현원간잠에 갑과 제2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런데 김일손이
백호 임제의 『원생몽유록』의 마지막 부분이다. 조금 뒤에 범 같은 한 사나이가 뛰어 들어왔다. 신장이 몹시 크고 용맹이 절륜(絶倫)하며, 얼굴은 대춧빛 같고 눈은 샛별 같으며, 문산 (文山)의 의리와 중자(仲子)의 청렴을 지녀 위용이 늠름하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을 불러일으켰다.문산(文山)은 송나라의 충신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의 호이다. 그는 1276년에 송나라의 수도 임안(臨安)이 함락되자 단종(端宗 재위 1276~1277)을 받들고 근왕군(勤王軍) 1만 명을 이끌고 분전(奮戰)하였다. 하지만 그는 원나라 장군 장
임제의 『원생몽유록』은 계속된다. 네 번째 앉은 사람 이공(李公 이개)이 읊었다. 이내 몸은 본래부터 높고 큰 담력 가졌으니 微臣自有膽輪囷어찌 차마 목숨 훔치며 무도한 세상 볼 것인가 那忍偸生見喪淪죽으면서 남긴 시 한 수는 그 뜻 또한 좋으니 將死一詩言也善두 마음 가진 사람을 부끄럽게 할 수 있다네 可能慙愧二心人이개는 군기감(지금의 서울시청 앞) 형장으로 향하면서 시 한 수를 남겼다. 삶을 우(禹)의 구정(九鼎)처럼 중히 여겨야 할 경우는 삶 또한 중요하지만 禹鼎重時生亦大죽음도 기러기 털처럼 가벼이 보아야 할 경우는 죽음도 영화로세
백호 임제(林悌)의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을 계속 읽어보자.술이 몇 잔 돌았을 때 임금(단종)이 술잔을 잡고 목메어 흐느끼며 여섯 사람을 돌아보고 말했다. “경들은 어찌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하여 원통함을 서술하지 않는가.” 여섯 사람은 “성상께서 먼저 노래를 지으시면 신들이 이어서 이루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임금이 초연(愀然)히 옷깃을 바로잡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며 노래했다. 강 물결 오열하며 끝없이 흐르니 江波咽咽兮流無窮나의 한 길고 긺이 강물과 같구나 我恨長長兮與之同살아서는 제후의 나라 차지했더니 生有千乘죽어서는 외
백호 임제(林悌)의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은 『백호집』에 실려 있고, 남효온의 『추강집』에도 실려있다. “세상에 원자허(元子虛 원호를 말함)라는 사람이 있으니, 강개(慷慨)한 선비이다. 기개와 도량이 넓고 커서 시대에 용납되지 못했기 때문에 슬픔을 품고 가난을 견디어야 했다. 아침에 나가서 밭을 갈고 저물 때 돌아와서 옛사람의 글을 읽었다. 일찍이 역사서를 보다가 역대의 위태로워 망할 지경에 처하거나 국운이 옮겨 가거나 운세가 떠나가는 곳에 이르면, 일찍이 책을 덮고 눈물 흘리며 마치 자신이 그 시대에 처하여 망해 가는 것을 보